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리 Nov 16. 2024

내가 불륜남이라는 거야

고매한 사랑을 꿈꾸면서




-그게 아니라 내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말이에요.       


“여보, 당신 옆머리가 너무 일자여서 이상해요.”

“앞머리가 휑해서 옆머리를 끌어오다 보니 그렇게 됐나 봐요.”        

  

이렇게 시작된 얘기가 어쩌다 불륜남 논쟁으로 번졌는지.

며칠 전, 일어나서 다른 것 다 제치고 글쓰기부터 시작하는 “모닝페이지”에 죽 글을 써나가다 소설을 쓰려면 사실정보가 아니라 사건정보가 있어야 하고, “내게 충돌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황선미작가의 서사작법이 떠올랐다. 내게 충돌한 사건이 뭔지 단서라도 고개를 들이밀어달라고 쓰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있었다.

내 안에 파트너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있다.       

  

너희도 그런 일 안 당할 줄 아냐.”는 지인의 악담이 대롱대롱 마음에 걸려 있었다.

머리를 하고 온 파트너에게 뜬금없이 “내 안에 당신에 대한 불안이 있다.”는 말을 내뱉었고 “내가 불륜남이라는 거야?”라는 말을 촉발시켰다. 머리 하러 간다고 새 옷으로 바꿔 입는 모습을 보면 디자이너에게 잘 보이려는가 싶어 짜증이 났다. 내 인생에는 파트너의 외도라는 문제가 안 생기길 바라지만,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일이고. 나도 나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여성디자이너가 아니라 남성원장에게 하라고 하지도 못한다.

지난번에 내 불안을 들은 파트너가 “그럼, 원장에게 머리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선뜻 “그래요. 동성의 원장에게 머리를 맡기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탈모인으로 매달 나가는 비용이 일반헤어숍보다 2배 이상 비싼 데다 원장이라 더 비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남성원장이 스타일을 잘 살리지 못했다. 올백은 나이 들어 보이니까 영국신사처럼 앞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부드러운 스타일로 바꿔 달라 했는데도 여전히 자기 스타일을 고집했다.


바뀐 여성디자이너는 처음에 일본사람을 만들어왔기에 영국신사처럼 앞머리 웨이브해달라고 한번 부탁하니까 비슷하게 스타일을 만들었다. 다음에는 뒷머리가 깔끔하게 손질이 안 되어서 바리캉으로 뒤와 옆을 깔끔하게 정리해 달라 했더니 그것도 조금씩 나아졌다.      

     

탈모인은 가발이 가위 날을 망친다고 일반헤어숍에서 받아주지 않고, 마음에 드는 탈모관리헤어숍은 대기자가 많아 가발을 예약하는데도 몇 달이나 심지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탈모관리헤어숍이 마음에 안 든다고 쉽게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다. 할인가격이라지만, 곧 170만 원이란 큰돈이 2년간의 파트너 가발비로 들어간다. 이것도 선금 10만 원을 제외한 금액이다. 돈이 꽤 많이 들어가는 사람이다 싶으면서도 자신이 번 돈에서 핵심 약점을 가리는 관리비용으로 쓰는 건 당연하고, 아직까지 젊어서 탈모인으로 면접을 보면 불합격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가발을 벗으면 적어도 10년 이상 나이 들어 보이니까 파트너도 나도 탈모를 드러내는 건 시기상조라고 느낀다.


군 제대 후 스트레스성 탈모인지 유전인지 모르게 정수리 탈모가 심각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워서 가발 없이 탈모인으로 직장을 다녔는데, 시어머니가 “아버지 선물”이라며 시아버지 부의금으로 200만 원 가발을 사주셨다는 말이 울림을 줬었다. 그만큼 아들에게 절실한 것이 좋은 가발임을 아셨던 거다. 아들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주고 가신 시아버지와 아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시어머니가 새삼 감사하다.      

    

분노를 식히러 나간 파트너를 기다리면서 사랑이란 뭘까’, ‘사랑은 누구에게 이익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를 돌아보았다.

사랑은 소유권을 주장하고 지키는 일인가. 아니면 상대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서로를 위한 존중과 배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인가. 7년간의 사랑은 무엇이었고, 우리 관계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를 흩날리는 낙엽 사이를 걸으며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우리 사랑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나 싶다.

처음에는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 파트너 위주로 생활 패턴이 돌아갔다. 파트너의 건강, 파트너의 선호를 맞춘 식탁, 파트너가 좋아하는 옷과 머리스타일로 외모 꾸미기 등 ‘나’는 없고 ‘그’만 있는 생활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선호보다 나의 선호에 맞췄고, 자기 생각은 감추고 내 생각을 최우선으로 행동했다. 누구 한 사람은 상대를 받아줘야 하는데, 둘 다 ‘나는 괜찮고, 당신이 어떤지가 중요해요.’라는 반응이니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둘 다 이건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그때부터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필요와 의견을 말하고 조율하게 됐다. 가령 같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다가 없으면 파트너는 냉면집으로, 나는 한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먼저 먹은 사람이 상대방 식당에 찾아오는 식이다. 요리에 재능이 없는 내가 입맛이 섬세한 파트너와 같이 사는 법은 정갈한 반찬가게를 자주 이용하고, 건강하게 같이 살려고 저녁식사 후에 아파트 헬스장에 같이 간다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가 거절할 때는 오해하지 않고 그 선택을 수용하기 등이다.     

   

내가 불륜남이라는 거야?”라는 파트너의 분노에는 나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신뢰를 깰 일은 없어요. 날 믿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었을까.

마음속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숨기거나 못 알아채고 자신을 건드린 상처에만 반응한 걸까. “내 안에 당신이 외도할까 봐 불안하고 두려워요.”라고 말을 건넬 때는 “염려 말아요. 당신을 실망시킬 일은 없을 거예요.”라는 파트너의 대답을 기대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날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요. 나만 사랑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었고.         


결국 내가 원한 사랑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랑, 상대의 유익이 아닌 내 유익을 원했다.

이토록 사랑은 시시하고, 때로 고매한 경지로 올랐다 살짝 발을 헛디디면 엄청난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떤 것. 사랑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이가 많지만 오늘은 어쩐지 문정희의 <남편>이란 시 구절이 입가에 맴돈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상처 입거나 배신당하더라도 열렬히 사랑할 것인가, 상처나 배신이 무서워 대충 사랑할까.

지금껏 해외에 나가 살아보지 못했다, 무서워서. 상처 입기 싫어 먼저 만나자는 말도 안 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열렬히 사랑하는 쪽을 택하겠다. 그러면 쪼끔이라도 고매한 사랑을 맛볼 수 있으려나.











*커버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만 해도 웃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