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꿈을 펼칠 기회가 있었더면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詩

by 보키

전 국민 애송시 1위 <진달래꽃>을 지은 김소월 시인.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고,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한 김소월 시인의 시 중 제일 긴 제목의 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제목이 길기도 하고 '보습'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라서 처음에는 아리송하게 닿아왔지만 '보습'에 '농기구'를 대입해 보면 그 시대상이 확 그려진다.(보습은 작은 농기구를 뜻한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작은 농기구라도 댈 땅'이 있었더면


일제강점기.

집 잃고 땅 잃어 정처 없이 떠도는 고난의 시대.

이 시는 역경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과 '의지'를 담고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나는 꿈을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함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다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시는 화자가 꾼 '꿈'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말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꿈이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어쩌면 당연한 일상의 모습이다.


즐거운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집 잃고 땅도 없어 정처없이 떠도는,
매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며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정처없이 떠도니
희망의 마음은 왔다 갔다 하고 미래는 아득하다.
그럼에도,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가슴에, 팔다리에' 떠오르길 화자는 간절히 바란다.

그 간절한 마음 또한 어쩌면 황송하다.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다란 길이 이어'간다. 실낱 같은 희망이 가느다란 길로 이어지고 '나는 한 걸음, 또 한걸음'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산비탈에 동무들이 각자 저 혼자서 산과 밭을 김매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진짜 현실이 보인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을 접하고 나는 '보습'대신 '꿈을 펼칠 기회'를 대입해 보았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꿈을 펼칠 기회가 많았더면


현재 공채로 성우를 선발하는 방송사는 KBS, EBS, 대원방송, 대교어린이TV-단 네 곳뿐이다. KBS와 대원방송은 매년 한 차례씩 시험을 실시하고, 대교는 2년에 한 번, EBS는 3년에 한 번꼴로 공채가 열린다. 시험에는 약 4,000명의 지원자가 몰리지만, 최종 합격자는 많아야 남녀 각 4명, 적게는 단 1명씩 선발한다. 성우 공채의 문은, 좁아도 너무 좁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성우지망생들은 직장을 병행하며 학원을 다니고,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수행하며 시험을 준비한다. 표면적으로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이의 선'은 존재하고, 체력 저하라는 현실적 문제에도 부딪힌다. 우리가 제출한 음원 파일을 모두 들어주는지조차 알 수 없고, 내 목소리를 선호하는 PD에게 파일이 닿기를 바라며, 내 연기가 부각될 수 있는 조에 배정되는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꼭 방송사에 들어가야 해? 그냥 성우 활동을 할 수는 없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전속 성우로 방송사에 일정 기간 활동해야만 한국성우협회 등록이 가능하다. 협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언더 성우'로 활동할 수 있지만 페이 차이, 기회의 제한이 있다. 예를 들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오디션은 협회 성우만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식 성우가 되고자 방송국 공채 시험에 도전한다.


낮에는 회사에 에너지를 다 쏟고, 퇴근 후 남은 힘을 쥐어짜 연습에 몰두한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성우 지망생으로 분류된 이중생활이 아닌 온전한 시간을 성우 일에 쏟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기에 연습에 매진하고, 학원에 다니며, 도전한다.


그렇게 2년, 5년...

길게는 13년, 14년을 지망하다가

결국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포기한다.


아직 성우라는 일과 꿈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지망생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미어지고, 그 모습이 곧 나의 미래 같아 착잡했다.


그런 와중에 김소월 시인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을 만났다.


시를 읽고 잠시나마 그 시대에 다녀와보고 그런 역경의 상황 속에서도 시를 쓰고 '희망'을 말하고 있는 김소월 시인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김소월 시인을 단지 순수하고 서정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라 생각했지만 이 시를 통해 고된 현실을 깊이 고민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진짜 김소월'을 만날 수 있었다. 기회가 적다고 불평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현실


땅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역경 속에서도 묵묵히, 각자, 산경을 김매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다.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


지금 내가 연습에 매진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 역시 '진짜 현실'임을 나는 직시한다.

누군가 나에게 '꿈을 펼칠 기회'를 부여해 주길 기다리기보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내 길을 찾기로 했다.


'꿈을 펼칠 기회'

내가 찾는다.

내가 잡는다.


시험에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겠다.

김소월 시인의 말마따나


나는
나아가리라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시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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