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황인숙 詩
개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네 마리의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로서, 나는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다. 특히 출퇴근길엔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그러나 황인숙 시인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확 사라졌다.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딛는 꿈을.
고양이로 태어난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도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는다. 안락한 집을 벗어나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 너른 벌판으로' 나간다. 인간에게 기대지 않고 제도에서 벗어나, 장난감 쥐돌이가 아닌 진짜 '들쥐와 뛰어' 놀고,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며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능동적으로 내 삶을 개척해 나간다.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태도가 바뀐 나의 삶은 즐겁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꿈을 갖는다.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에도 어둠은 찾아온다. '들쥐도 참새도 가 버리고 /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외롭다. 그래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적극적으로 돌파해 나가겠다.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나의 공간, 나의 세계를 만든다.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한. 이 곳에서 '깊이 웅크리리라' 웅크리기도 했다가, '달빛을 받아 / 은은히 빛나'기도 할 것이며,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시련이 몰아닥치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것이다. '나는 꿈을 꾸리라' 나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이다. '놓친 참새를 쫓아 / 밝은 들판을 내딛는 꿈을.'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를 모시고 있다.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고양이를.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고양이를 보며 '나도 고양이로 태어났으면'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황인숙 시인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읽으며, '고양이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집 안에 갇혀서 주는 대로 먹고, 놀아줄 때에만 놀 수 있는 삶을. '아,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의 고충이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틀 속에 갇힌 삶
아무도 내게 '틀'을 만들어 주지 않았는데, 내 스스로 틀 속에 나를 가둬둔 적이 있다. '내 환경은 좋지 않으니까, 나는 할 수 없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단정 지으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멈춰 서 있었다. 편한 길을 택하며,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다.
편한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불편해졌다. 표정은 어두워졌고 생각과 의지가 사라졌다. 삶은 점점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무의미한 삶 속에서 애써 외면했던 '꿈'은 어느새 조용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한 달만 해보자'는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그렇게 나를 가두었던 틀을 부수고, 삶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즐거웠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배움은 뜨거웠다. 가볍게 꺼낸 시작이 점점 무게를 가졌고, 어느덧 '이루고 싶다'는 갈망은 단단해졌다. 내 시간은 점점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꿈을 위해 시간을 쏟았지만, 결과는 바람대로 나오지 않았다. 즐거움은 시련으로 바뀌었고, '나는 재능이 없나?', '포기해야 하나?'라는 의심이 몰려왔다. 나는 또다시 틀을 만들었다. 엉엉 울며 그 안에 웅크렸다. 그 속에서 '그래도 하고 싶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또다시 틀을 깨고 나와, 꿈을 향해 다시 걸었다.
가두고, 부수고, 다시 전진하고ㅡ 그 반복 속에서, 꿈을 향한 의지는 단단해졌다. 이제, 꿈은 삶이 되었다.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다져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나는 꿈을 삶 속에 녹여내고 있다.
나는 고양이가 되었다. '가시 덤풀 속을 누벼누벼 / 너른 벌판으로 나가'는 고양이. '제일 큰 참새를 잡겠다'는 고양이.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아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고양이.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벌판을 쏘다닐지' 몰라도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고양이. '꿈을 꾸리라. /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딛는 꿈을' 꾸는 고양이.
황인숙 시인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자칫 어두워질 수 있는 내 꿈의 목소리를 유쾌하고 당찬 고양이의 목소리로 만들어 주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ㅡ 혹 꿈을 꾸다 지쳐 있다면, 이 시를 한 번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새로운 꿈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