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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새 Jul 24. 2023

후추치즈 마들렌

다시 돌아오다.

쉬는 동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다시 기록을 시작하게 되면 쓰려고 메모장에 생각나는 문장을 적어두기도 했었는데, 막상 오랜만에 메모장을 켜서 새로운 기록을 시작하려 하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좀처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아서 삼십 분 쯤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만 쳐다보았다.


길어야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휴식 기간이 두 달을 넘어 석 달을 향하게 되니, 기껏 마음 편히 쉬려고 마련한 시간에 불편한 마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과 곧 돌아오겠다고 종종 일상을 스토리에 올리겠다고 말해놓고는, 한 번도 제대로 되돌아보지 않고 밀쳐 두었던 부채감이 마음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핑계를 대보자면 나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이번 주에는 꼭 새로운 마들렌을 만들자고 다짐하는 게 매일 밤의 일상이 되었을 때쯤, 공교롭게도 병원에서 스트레스를 좀 조절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마들렌뿐인 건 아니었지만, 즐겁기 위해 하는 일이 되레 나를 괴롭힌다는 건 아무리 봐도 너무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좀 더 멋지고 신선한 여름 마들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쓸데없는 부담감도 벗어던지고, 다시 돌아오면 매주 새로운 마들렌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생각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렇게 오늘 다시 마들렌을 구웠다.


어떤 마들렌을 구워야 할지 고민이 되긴 했었는데, 역시 남겨둔 숙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실패로 마무리했던 마들렌을 다시 굽기로 했다.


오늘 만든 마들렌은 후추치즈 마들렌이다.



사실 후추치즈 마들렌은 마지막으로 포스팅했던 ‘봄동산 마들렌’ 다음으로 준비했던 마들렌이다. 당시 새로 후추를 구입하면서 후추를 주제로 한 마들렌 몇 가지를 고민하다가 계획하게 된 마들렌이었는데, 새로 산 후추를 멋지게 찍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도 올리고 맛있는 후추 마들렌도 포스팅하려던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후추 마들렌의 최후는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점은 반죽에 잔뜩 섞은 치즈 때문에 생각과는 달리 마들렌의 배꼽이 아주 밋밋하게 부풀었다는 것이었는데, 포스팅 자체야 이런저런 말을 붙여 어떻게든 진행할 수 있었지만, 그 전주에 이어 또다시 나의 계획과는 다른 마들렌이 완성되었는데, 그저 포스팅을 하기 위해 타협하고 합리화하려는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실망스럽게 느껴져서 포스팅을 멈추고 잠깐 쉬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실패했던 후추치즈 마들렌의 레시피를 다시 살펴보니 재료의 비율상 내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질 만한 부분이 보여서 레시피를 전반적으로 수정했고 다시 온전한 후추치즈 마들렌 만들기를 도전하게 되었다.


후추는 ‘Piper nigrum’이라는 인도 남부 원산의 식물에서 수확한 열매로 색상에 따라 그린, 블랙, 레드, 화이트의 네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후추치즈 마들렌에는 적후추(레드 페퍼)를 사용했는데, 적후추는 같은 품종의 열매임에도 흑후추나 백후추와는 확연히 다른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과일 향이 난다고 표현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집에서 토마토를 건조할 때 나는 향과 아주 흡사한 향을 느낄 수 있었고, 직접 입에 넣으면 특유의 달큰한 뒷맛이 자아내는 과일스러운 풍미 덕분에 은은한 과일 향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래봤자 후추는 후추다(맵다).


처음에는 견과류를 가득 넣은 초콜릿 마들렌에 흑후추를 더한 후추 마들렌을 생각했었는데, 막상 적후추의 풍미를 맛보고 나니 그 풍미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적후추의 풍미가 묻히지 않도록 초콜릿 대신 크림치즈와 소량의 염소 치즈로 맛을 살린 치즈 믹스를 사용하기로 했고, 다양한 견과류 대신 적당한 크기로 다진 피스타치오만 사용해서 적후추 특유의 풍미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치즈의 은은한 풍미와 적후추의 묘하게 달큰하고 과일스러운 풍미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잔잔한 매콤함이 포인트가 되어주는 멋진 마들렌이 완성되었는데, 만든 직후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퍽퍽한 식감이 강해져서 아쉬웠다.


아무튼 마들렌을 다시 구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느린 호흡으로 진행하게 되겠지만, 역시 앞으로도 예전처럼 열심히 마들렌 기록을 이어 나가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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