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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건조 딸기 마들렌

우연이 가져다 준 선물

by 거울새

5월쯤 마트에 갔다가 놀라운 가격의 딸기를 발견하고 얼른 집으로 데려왔다. 그럭저럭 괜찮은 크기의 알맹이가 놓여있던 위층과는 다르게 아래쪽의 알맹이는 상당히 작았지만, 크게 무르거나 썩은 것도 없었고 맛이나 향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기 전 생딸기를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아서 괴로웠지만, 결국 알이 적당히 큰 딸기는 먹고 나머지는 딸기 과육을 살려서 묽은 잼을 만들어 두었다.

삶은 오늘도 언제나처럼 마음 같지 않다. 혹시 삶이 좀 더 내 마음처럼 흘러갔다면, 나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마음처럼 흘러가는 삶이 꼭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 것도, 마음 같지 않은 삶이 꼭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니까. 마트에 가서야 매력적인 가격의 딸기를 발견한 것처럼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사실 딸기도 18세기 이전에는 관상용 식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18세기 초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칠레에 있는 스페인 군을 염탐하기 위해 파견된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가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관찰하던 야생 딸기에 관한 책을 출간하면서 유럽 식물학자들이 딸기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딸기의 운명도 지금과 같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산 딸기 역시 생각지 못한 여정을 거쳐왔는데, 20여 년 전만 해도 국산 딸기는 일본 품종이 장악한 국내 딸기 시장에 발을 붙이기도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지만, 정부가 국산 품종 보호를 위해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에 가입한 후 생각지도 않았던 로열티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급하게 일본 품종 대체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결국 기적적으로 점유율을 끌어올려 지금은 되레 국내 딸기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마 루이 14세도, 프레지에도, 정부 관계자들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원래 삶이란 건 그때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니까.

묽은 딸기잼은 당도가 꽤 높은 편이라 시간이 지난다고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들렌을 만들려는 의지가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괜스레 조바심이 났다. 고민 끝에 일단 수분감이 강한 딸기를 살짝 말려서 새로운 마들렌을 만들기로 했다.

당절임한 과일은 표면의 시럽 때문에 건조 시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탈 수 있어 주의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한눈을 팔다가 표면을 태울 뻔했다. 캐러멜화로 표면이 마치 건포도처럼 단단해진 딸기를 바라보면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반건조 딸기는 처음 계획보다 너무 단단하고 쫀쫀했고, 응축된 딸기 맛과 향만큼이나 씨앗도 고스란히 남아 적잖이 거슬렸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씨앗이 오도독하며 씹히는 식감이 되레 재밌기도 했고, 건포도 느낌이 나서 제법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처음 생각했던 생딸기 마들렌의 느낌을 살리긴 힘들 것 같아서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우선 크림치즈에 설탕 없이 딸기잼을 이용해 딸기의 향과 단맛을 더했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 반건조 딸기와 살짝 으깬 딸기 과육을 섞어 다채로운 딸기의 풍미와 다양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 반건조 딸기 크림을 만들었다. 마들렌 반죽은 평소보다 설탕의 양을 줄이고 묽은 잼과 으깬 딸기 과육을 함께 섞어서 부드러운 속살과 은은한 딸기향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은은한 딸기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기분 좋은 부드러움을 선사하는 퐁실한 마들렌에는 만든 지 하루 정도 지난 크림치즈 필링을 잔뜩 채워 넣어서 적당히 수분을 머금어 한결 부드러워진 쫀득한 반건조 딸기와 부드러운 식감의 딸기 과육 그리고 오도독한 식감의 씨앗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생딸기가 가득 든 상큼한 딸기 폭탄 마들렌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딸기의 풍미와 식감이 조화를 이뤄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다. 생딸기가 묽은 딸기잼이 되고, 그게 다시 반건조 딸기가 되기도 하는 게 바로 삶이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니 지금 하는 일이 좀처럼 마음 같지 않아도 너무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사는 게 너무 힘이 들 땐, 프랑스 스파이가 우리에게 준 ‘딸기’라는 선물을 떠올려보자. 지금 겪는 불행은 언젠가 인생의 ‘딸기’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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