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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트 마들렌

2024년 3월 말의 기록

by 거울새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고 잘난 자식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혼자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을 끼치는 자식이 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 몫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식이 되고 싶었는데, 그 평범함이 내게는 아득히 멀기만 하다.

지난여름, 어머니가 악성 흑색종 진단을 받으신 이후 우리의 삶은 무언가 어긋나 버린 것 같다.

다행히 아주 초기에 발견했기에 별다른 항암 치료 없이 외과적인 수술 선에서 암 조직을 제거할 수 있었고 추적 관리만 잘하면 되는 더없이 감사한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 자체가 엿보여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부정적인 미래의 가능성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으면서 조금씩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프신 만큼 걱정하시지 않도록 올해는 좀 더 건강하고 싶었는데, 새해가 밝자마자 몇 주 동안 얼굴이 2배는 부풀어 오르고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자잘한 증상들이 끝없이 온몸을 괴롭히니 삶이 참 야속하기만 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아픔에 각자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 점점 사치가 되어갔다.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설 명절 당일, 내 걱정에 결국 아침부터 눈물을 터뜨리신 어머니를 위로하며 정말 오랜만에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죄스러운 자식인데 더한 죄를 얹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나뿐이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끝없는 우울감의 구렁텅이에 몸을 던졌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기어 올라오길 반복하며, 그냥 그렇게 버텨냈다.

그나마 맛있는 음식이라도 열심히 챙겨 먹으면 건강 회복에도 좋고 기분도 좋아질 것 같아서 어머니와 최대한 먹는 것에 신경을 썼는데, 얼마 전 너무 잘 챙겨 먹으려 하다 보니 되레 위에 부담이 돼서 소화도 안되고 체력도 더 떨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그마저도 반쯤 포기해 버렸다.

언젠가 이 시간을 회상하면서 웃음 짓는 날이 올까. 지금은 그 시간이 요원하기만 하다.

이미 일반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식사량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한없이 연약한 내 몸을 위해 식사량을 조금 더 줄였다. 분명 회복을 위해 누워있는데 어째 점점 더 몸이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 힘들지만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무언가를 더 바랄 기운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단순한 꾸준함이 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마들렌을 굽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도 마들렌을 구웠다.

마들렌을 굽지 못하던 시기에도 언제든지 기회만 된다면 마들렌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미리 구상해 둔 마들렌 레시피도 몇 가지 있었는데, 워낙 매일의 몸 상태를 장담할 수 없다 보니 레시피가 복잡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느낌이 들어서 최대한 간단하면서 부담 없는 마들렌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유통기한을 코 앞에 둔 요거트가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에서는 요거트 한 통으로 모든 계량까지 다 할 수 있는 요거트 가또를 마치 우리네 떡볶이처럼 집마다 다른 레시피로 즐겨 먹는다는데, 그거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거트 가또는 파운드케이크와 재료 구성이 흡사하지만, 가벼운 맛을 위해 지방의 비율을 절반 이상 줄이고 그 빈자리를 요거트로 채우는 것이 특징이다. 버터 대신 오일을 사용하는 레시피도 상당히 많은데, 나는 버터의 풍미를 선호해서 버터를 사용하기로 했고 다소 밋밋할 수 있는 맛을 보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설탕량을 늘리고 소량의 레몬 제스트를 넣어 향을 더했다.


오랜만에 마들렌을 만드는 만큼 재료를 준비할 때부터 오븐에서 마들렌을 꺼내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는데, 퐁실하게 부풀어 오르는 마들렌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일반적인 마들렌과 레시피 차이가 커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반으로 갈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들렌을 어머니와 나눠 먹으면서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요거트의 풍미와 은근히 퍼져나가는 레몬 향이 너무나 기분 좋게 느껴졌고, 달달하면서 부드럽고 쫀득한 마들렌 속살이 바삭한 표면과 대비되며 ‘이 맛에 마들렌을 구웠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산다는 건 괴로움의 연속이지만, 결국 삶을 지탱하는 건 이런 작은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들렌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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