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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호두 마들렌

2024년 1월 중순의 기록.

by 거울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몸 여기저기가 불편해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제풀에 지쳐 잠들었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잠결에 눈이 좀 부었나 싶어서 눈을 비볐는데, 눈조차 제대로 비빌 수 없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휴대폰 카메라로 얼굴을 비춰보니, 얼굴이 산처럼 부어있었다.

사실 저번 주부터 조금씩 트던 피부가 이번 주 들어서 본격적으로 울긋불긋해지면서 각질까지 일어나기에 피부가 뒤집어졌나 하긴 했는데, 이렇게 얼굴까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가끔 이유 없이 눈 근처가 부어오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눈을 뜨기 힘들 만큼 얼굴 전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건 처음이라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방 밖으로 나와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났다.

안 그래도 며칠째 아토피 환자처럼 뒤집어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어떡하냐며 걱정을 내뱉으시던 어머니께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시며 달려오셨다.

잔뜩 부푼 눈두덩이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경험상 몸의 문제로 피부가 뒤집어지면 결국 몸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피부도 나아지지 않는데, 몸의 문제가 해결되면 정말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게 나아진다. 문제는 보통 가려움증이 동반되는데, 이 가려움증이란 건 무조건 참는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라서 결국 참다못해 긁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때 생긴 상처는 피부 문제가 해결돼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었다.

하필 이번엔 얼굴이 가장 많이 뒤집어져서, 연신 찾아오는 가려움증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새해 액땜이라 애써 웃어넘기고 있었는데, 얼굴까지 산처럼 부어오르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저 눈물이 났다.

가끔은 인생이 나를 끊임없이 시험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이 점점 더 부어올라 얼핏 보면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쯤, 문득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오늘의 마들렌은 바로 바나나 호두 마들렌이다.

얼마 전 어머니의 정기 검진일에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가다 보니 중간에 아침을 해결해야 했는데, 마침 껍질이 완전히 거무스름하게 변한 바나나가 집에 있길래 아침 대용으로 바나나 브레드 레시피를 변형한 바나나 호두 마들렌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나나 브레드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퀵 브레드이다.

퀵 브레드는 효모를 발효시켜 만드는 전통적인 빵과 달리, 화학적 팽창제(베이킹파우더, 소다)를 이용해 발효 없이 빠르게 구워내는 빵을 말하는데, 1933년 한 요리책에 처음 등장한 퀵 브레드 형태의 바나나 브레드는 대공황으로 식비를 아끼기 위해 고민하던 미국 주부들에게 너무 익어 버린 바나나를 처리하기 위한 아주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후 각종 향신료와 부재료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형태로 발전했고, 점차 전 세계에서 사랑받기 시작했다.

주재료의 수분감이 강하고 부재료가 많은 탓에 식감이 필요 이상으로 묵직해질 수 있어서 우리나라에선 보통 지방 재료로 오일을 사용하는데, 사실 화학적 팽창제가 충분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버터를 사용해도 큰 상관은 없다.


든든한 아침용 마들렌을 만들겠다며 호두, 아몬드 가루, 계피 같은 부재료를 잔뜩 넣고 풍미를 위해 버터까지 사용했는데 완성된 반죽이 생각보다 너무 묽어서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전체적으로 적당히 부풀어서 속살에 떡진 느낌은 전혀 없었다.

사실 새해 첫 마들렌으로는 너무 밋밋한가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든 마들렌은 여전히 맛있었고, 기록은 즐거웠다. 게다가 사진 작업 중 별생각 없이 찍은 가장 낮게 부푼 아이가, 호두 두 개에 의지하여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이 요즘의 나와 겹쳐 보여서 새해 첫 마들렌으로써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다른 사람들처럼 엄청난 일을 해내지도, 특별한 일을 이룩하지도 말고 그저 별 탈 없이 잘 버텨주기를, 언제나처럼 잘 이겨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믿는다.

저 낮게 부푼 바나나 호두 마들렌처럼 올해의 나도, 올해의 여러분도 꼿꼿이 버텨낼 수 있을 거란 걸, 웃으며 버텨낼 수 있을 거란 걸 나는 믿는다.

물론, 다들 너무 힘들면 망설임 없이 도망가서 그곳이 원래 제자리인 양 뻔뻔하게 버티고 서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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