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재료는 없다
아직은 캄캄한 새벽, 문득 눈을 떴다. 좀 더 잠을 자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돌려 누워보았지만, 어떻게 누워도 가시 위에 누워있는 듯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밤새 태풍과 함께 몰려온 습기 때문에 또 한 번 찜통 같은 더위가 시작됐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창문을 닫고 잤더니 물에 젖은 공기가 폐를 짓눌러 답답함이 몰려왔다. 한참을 더 뒤척거린 뒤에야 오늘 하루가 이미 시작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로 나가 창문을 열자 좁은 틈 사이로 새벽의 창백한 상쾌함이 쏟아져 들어왔다.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난 듯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새벽의 고요함. 전쟁 같은 하루를 앞두고 더없이 감사한 공백을 오롯이 즐기기로 했다.
사실 벌써 보름 넘게 어머니의 컨디션 난조가 계속되고 있어서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겨우 차려내고 뒷정리를 하고 쓰러지듯 의자에 기대어 잠들었다 깨어나면 다시 다음 끼니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분명 저번 주보다는 기온이 조금 내려간 것 같았는데, 쉴 새 없이 배어 나오는 땀은 오늘도 여전히 마치 피부의 일부인 양 여기저기 끈질기게 달라붙어 자연스레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침 메뉴를 고민하며 조용히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냉장고 한구석에 있던 브리 치즈와 눈이 마주쳤다. 얼마 전 호기심에 구매했지만, 생각보다 입에 딱 맞는 맛은 아니어서 냉장고 한구석을 차지하게 된 녀석이었다. 브리 치즈의 별명은 ‘치즈의 왕’이라는데, 나는 왕의 입맛을 타고 나진 못한 건지 진한 우유 맛 뒤에 은은하게 퍼지는 쎄한 향미가 못내 낯설게 느껴졌다. 포장을 열면 진하게 풍겨오는 묘한 쿰쿰함과 직관적으로 보이는 곰팡이 친구들 덕분에 매일매일 신선도에 대한 의문이 들어 좀처럼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는데, 제대로 사용도 못 해보고 냉동하는 건 좀 억울한 것 같아서 차마 냉동도 못하고 있었다. 곰팡이 같이 흉흉한 친구와 함께 지내는 주제에 저장기간은 짧은 편이어서 어쩌면 이대로 이별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대책이 필요했다.
문득 염소 치즈가 떠올랐다. 염소 치즈는 브리 치즈 이상으로 짠맛이 무척 강하고 퀴퀴한 누린내가 은근히 풍기는 아이였는데, 마들렌 반죽에 소량 섞어 주었더니 마들렌의 단맛과 풍부한 버터 향이 염소 치즈의 강한 짠맛과 구리구리한 냄새를 중화하면서 농축되어 있던 긍정적인 풍미가 너무나 부드럽게 피어올라 그야말로 화사한 맛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 어쩌면 브리 치즈와의 추억을 좀 더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늘은 점심에 브리 치즈 마들렌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브리 치즈 외피의 하얀 곰팡이가 다소 부담스럽다면 부드러운 속살만 먹어도 되지만, 원래 곰팡이가 핀 외피가 브리 치즈의 정수라고 하니 왠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외피까지 잘 으깨서 마들렌 반죽에 섞고, 반죽 위에는 브리 치즈를 잔뜩 올렸다. 내가 구매한 브리 치즈처럼 숙성이 충분히 진행되면 쎄한 느낌의 암모니아 냄새와 함께 짠맛도 강해지는데, 사용하는 브리 치즈의 양이 늘어나면 짠맛이 되레 단맛을 억눌러 밋밋한 맛이 될 수 있으므로 평소보다 단맛을 더해주는 게 좋다. 설탕의 양을 늘려도 되지만, 브리 치즈와 꿀의 조화가 좋으므로 설탕 대신 꿀을 추가로 넣어주었다. 새콤달콤한 과일이나 견과류도 추천할 만한 재료인데, 계절을 고려해서 비교적 맛이 묵직한 견과류는 제외하고 상큼한 맛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마들렌 반죽엔 레몬 제스트로 향긋함을 더하고 살구 청에서 건진 쫀득한 살구 한 알을 반죽 위에 올려주었다.
조금은 색이 짙게 구워진 마들렌을 한입 가득 베어 무니 상큼한 여름의 맛이 느껴졌다.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브리 치즈를 되레 한가득 올리고 그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멋진 여름의 풍미들을 오롯이 담아내니 브리 치즈의 쎄한 뒷맛은 레몬의 상큼한 풍미가 되어 있었고, 브리 치즈의 묵직한 풍미는 달콤한 꿀 향과 함께 가벼운 몸짓으로 입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탄 게 아니라 그저 색이 짙어져 버린 마들렌에는 어느새 여름의 응원이 담겨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운 여름도 조금씩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여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의 더위가 오히려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더없이 힘겨운 여름을 보내고 있지만, 또 다른 여름의 맛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천천히 음미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