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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임자 커피 마들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

by 거울새

가을을 맞아 한걸음 높아진 하늘의 빈자리를 힘없이 흘러나오는 한숨이 가득 채우고 있는 요즘, 끝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아내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한여름 내내 엉켜버린 삶이란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느새 그 노력은 욕심이 되어버렸고 뒤늦게 가위를 들어 실을 잘라내려 해도 어디를 잘라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 기분이다.


어제는 매실청을 걸러냈다. 원래는 1주일 정도 더 있어야 예정일이 되는데, 얼마 전 교통사고로 입원을 해서 1주일 정도 집을 비웠더니 에어컨도 전혀 틀지 않고 창문도 닫혀있던 집이 막바지 여름의 더위에 제법 달아올랐던 건지 매실청들이 한껏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퇴원 직후엔 도저히 여력이 되지 않아서 며칠 더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제는 매실청의 상태를 보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3개월이란 시간을 녹여낸 달콤함의 끝에 미묘한 알콜향이 미세하게 남고 말았다. 언짢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탈출해 매실청의 상태를 매일 살펴야 했을까. 요즘은 이런 식의 일이 한가득이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잔뜩 심통을 부리려다가 땀에 젖어서 허탈한 표정으로 아픈 허리를 집고 계신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억지 미소를 찡긋 짓고 그냥 그렇게 털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머리를 비우고 마들렌을 구웠다.


아침 7시면 내 자리까지 손수 식사를 옮겨주시는 바람에 매일 7시면 반쯤 감긴 눈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던 입원 생활 때처럼, 7시만 되면 정확히 공사를 시작하시는 길 건너 작업자 분들 덕분에 오늘도 7시에 일어나 버려서 아침을 먹기 전까지 후다닥 마들렌 반죽을 만들었다. 전날 매실청을 걸러내고 냉장고에 매실청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사고 후 다소 불편해진 어깨가 한층 더 결리긴 했지만,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마음마저 시들어 버릴 것 같아서 그냥 마들렌을 만들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마들렌과 함께 마실 커피가 없다며 커피부터 볶아야겠다고 나섰겠지만, 커피가 없다면 커피맛 마들렌을 만들면 된다는 마음으로 원두 보관통에 아주 조금 남아있던 원두를 밀가루처럼 곱게 갈아 반죽에 섞어주었다. 커피 가루나 에스프레소를 사용해서 커피의 풍미를 살려도 되지만, 소량의 원두를 직접 반죽에 넣어주면 좀 더 다채로운 진짜 커피의 향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냉장고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흑임자 가루도 조금 넣어주었는데, 견과류를 함께 섞는 것도 좋지만 흑임자를 섞어주면 특유의 고소함이 은은하게 커피 향을 감싸주어서 또 다른 매력의 마들렌을 만들 수 있다.


병원에 다녀와서 별다른 추가 작업 없이 그대로 구워낸 마들렌은 언제나처럼 퐁실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의도치 않은 일이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세상에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무언가를 실제 하는 결과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요리라는 존재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요리마저도 종종 의도치 않은 부분이 생기기도 했지만, 급작스레 겪은 교통사고 같은 돌발상황과 비교하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좀 더 진한 커피 향을 위해 마지막 순간 급하게 발라준 커피 글라쎄 덕분에 단맛이 다소 강해져 버린 마들렌은 솔직히 내 의도와는 다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기분 좋게 느껴지는 바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었고, 흑임자의 은은한 고소함과 함께 커피 없이도 진한 커피의 풍미를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어서 결과적으론 만족스러웠다.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들렌마저 실패했다고 또다시 짜증을 낼 수도 있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니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하는데,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불행의 빈도를 낮추는 것도 행복을 위한 길이 될 수 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억지로 찡긋 웃고 그냥 털어버리자.


마치 불행이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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