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보내는 고마운 마음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길어서 좀처럼 추석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연휴가 시작되고 동네가 묘하게 고요해지니 비로소 추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큰 집이었지만 친척들과 왕래가 잦지 않아 사실상 허울뿐인 큰 집이었기에 내게 명절이란 북적이는 느낌보단 고요한 휴일의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고향으로 내려가서 동네가 조용해지면 오히려 명절이 찾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손수 장만하시는 명절 음식이 아니었다면 아마 제대로 된 명절 느낌도 몰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께 명절은 매년 너무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숙제였다. 맏며느리로서 따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홀로 명절 음식을 모두 차려내셔야 했기 때문에 명절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는 항상 앓아누우시곤 하셨다. 그래서 머리가 조금 자라 어머니의 노고를 이해하게 된 이후로는 사실 명절이 그렇게 달갑진 않았다. 중학생 때까지는 괜히 실수라도 하면 일이 더 많아진다며 일도 돕지 못하게 하셨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엔 명절 연휴에 점심을 도맡아 준비하면서 어머니를 도울 수 있었고, 대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한식 조리 수업을 수강한 후에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고 명절 음식 장만에 동참하게 되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작년엔 어머니가 갑작스레 암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 후 병원 앞 단기 숙소에서 초조하게 수술 결과를 기다리느라 사실 추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힘든 시간을 무사히 견뎌주시고 다시 한번 추석을 함께 맞아주시는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져서 올해는 오랜만에 추석 분위기를 조금 내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송편 마들렌을 만들었다.
송편은 의외로 지역적 특색이 강한 편인데, 그중 조개의 풍년을 기원하며 조개 모양으로 빚어낸 평안도의 ‘조개송편’을 만들기로 했다. 다행히 소에 조개가 직접 들어가는 건 아니고 깨 소를 만들어서 넣으면 되는데, 소금이 아닌 국간장을 이용해서 간을 하는 게 특징이다. 깨 소는 깨를 갈아서 설탕과 섞어 만드는데, 깨를 곱게 갈지 않고 적당히 갈아서 약간 씹히는 맛이 있도록 하는 게 포인트이다. 대신 송편과 달리 마들렌은 구워낸 뒤 소를 채우기 때문에 소가 너무 건조하면 먹기도 불편하고 식감도 너무 푸석하게 느껴질 수 있어서 조금 촉촉하게 만드는 편이 좋다. 나는 흑임자를 절구로 으깬 뒤 국간장과 설탕 그리고 꿀을 조금 섞었고, 점도가 어느 정도 생기도록 물을 조금 더해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 식혀 두었다. 문득 콩 송편도 생각이 나서 적당히 삶은 콩을 체에 내린 뒤 꿀을 섞어 콩 소를 만들고, 깨 소와 함께 넣기 위해 달처럼 동글동글하게 굴려두었다. 반죽에는 쑥대신 깻잎을 섞어주었다. 깻잎을 사용한다는 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은근히 향이 좋고 위화감도 없으면서 구하기도 쉬운 편이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재료 중 하나다.
퐁실하게 부푼 마들렌의 배꼽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송편을 빚듯 정성스레 속을 채운 후 배꼽을 다시 닫아주면 달을 품은 송편 마들렌이 완성된다. 마치 쑥처럼 풍겨오는 은은한 깻잎의 향과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깨 소의 풍미를 느끼다 보면 어딘가 송편을 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국간장을 사용해서 간을 한 만큼 달달한 깨 소와 콩 소의 고소한 단맛 뒤로 치고 나오는 은근한 짠맛을 느낄 수 있는데, 흑임자 특유의 씁쓸함과 국간장의 감칠맛이 좋아서 일반적인 깨 소보다 좀 더 매력적인 맛이 났다.
연휴 내내 날이 흐려서 좀처럼 달을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추석 당일에는 날이 조금 개어서 구름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연휴 첫날 아침부터 어머니가 수술 후 사용 중이던 보조 기계에서 경고음이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바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촌역 상점가를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던 작년 추석 연휴가 떠올랐다. 불확실한 상황이 연이어 펼쳐져서 슬프다기보단 먹먹하기만 했던 그날의 저녁. 다행히 숙소 주변에 영업하는 가게가 있어 저녁거리를 사서 돌아오다가 빌딩 숲 사이로 우연히 눈이 마주친 달을 바라보며 그저 어머니가 괜찮기만을 기도했었다. 이후로도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어쨌든 어머니와 멀쩡하게 또 한 번의 추석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올해는 더 바랄 것도 없이 그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다음 추석에도 웃으며 달을 바라볼 수 있게 올해도 힘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들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