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학습되는 입맛
무화과의 계절이 왔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무화과의 주산지인 남부 지방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무화과를 어렵지 않게 보면서 자라셨다. 체감상 집마다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씩은 있었고, 무화과가 너무 흔하다 보니 길가다 한두 개 따먹는 정도로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나는 몇 년 전까지는 무화과에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사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마트에서는 무화과를 보기 쉽지 않았고, 어쩌다 무화과를 봐도 다른 과일과 비교하면 맛도 밋밋하고 평범해서 그다지 사 먹을 만한 과일은 아니라는 말씀을 어머니께 줄곧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병을 위해 남부 지방으로 내려온 이후, 동네에서 길을 걷다가 무화과나무를 직접 목격하는 일이 잦아졌고, 무화과를 이용한 디저트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무화과의 인기도 점점 높아졌기에 자연스레 무화과에 대한 나의 호기심도 조금씩 자라났다.
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갖게 된 무화과와의 첫 만남은 다소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다. 보석처럼 붉게 빛나던 영롱한 속살은 상상과는 다르게 아주 밋밋하고 오묘한 단맛을 내고 있었는데, 한동안 말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입안에 든 무화과에 대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생각해 낸 말은 바로 ‘양파’였다. 과일의 단맛이라기엔 뭔가 빛이 바랜, 다소 밋밋하면서도 은은하지만, 분명히 느껴지긴 하는 이 단맛은, 오랜 시간 충분히 볶아서 캐러멜화된 양파로 우린 육수에서 나는 단맛과 아주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원래 맛이 그렇다니까’하고 웃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어디선가 아직 맛있는 무화과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인가 더 시도한 후에야 결국 맛있는 무화과 찾기를 포기했었는데, 그렇게 매번 실망하며 먹어내던 무화과가 입에서 제법 익숙해졌는지 우습게도 올해는 무화과의 맛이 꽤 괜찮게 느껴졌다. 물론, 무화과의 품종은 수백 종류가 넘는다고 하니 세상 어딘가에는 꿀처럼 달고 상큼한 무화과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올해 먹은 무화과는 마트에서 구매한 아주 평범한 할인 상품이었고, 몇 년 전에 맛보았던 그 맛 그대로 오묘하면서도 밋밋한 단맛을 품고 있었다. 근데, 무화과의 맛은 분명 그대로였지만, 그 맛을 느끼는 내가 어느새 그 맛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분에 올해는 제법 많은 양의 무화과를 맛보고 있는데, 이 정도면 마들렌에 사용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무화과로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와인에 졸이거나 잼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뻔한 느낌의 마들렌을 만들긴 싫어서 어떤 마들렌을 만들지 한참이나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우연히 터키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무화과 푸딩에 대해 알게 되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잘게 자른 건무화과를 넣고 실온에서 3시간 이상 발효시켜 만드는 음식이었는데, 농도만 잘 조절하면 마들렌 필링으로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무화과 자체의 단맛을 살리기 위해 살짝 말려 단맛을 응축시킨 반건조 무화과를 갈아 넣었고, 부족한 단맛과 애매하게 묽은 농도는 소량의 설탕과 전분을 더해 조정해 주었다. 우유만 사용한 푸딩은 약간 가벼운 느낌이 있어서 사워크림을 섞어줬는데, 우유보다 풍부한 유지방 맛과 약간의 산미가 돌아서 그냥 우유만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또한 푸딩 위에는 호두를 다져 올리기에 호두처럼 고소하면서 씁쓸한 맛도 느낄 수 있는 흑임자를 곱게 갈아서 마들렌 반죽에 섞어주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마들렌의 배꼽을 사정없이 파내고 미리 만들어 놓은 무화과 푸딩을 가득 채웠다. 완성된 마들렌을 한입 가득 베어 무니 오도독한 무화과의 식감과 함께 상큼하고 부드러운 무화과 푸딩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사실 무화과 푸딩은 곱게 갈아서 만들기 때문에 무화과 특유의 식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없는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아낌없이 잘라 넣은 반건조 무화과가 대신 쫀득하면서도 오독오독한 식감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무화과 푸딩 마들렌의 화룡점정이 되어 주었다. 거부감 없이 고소하면서도 아주 은은하게 씁쓸한 맛이 나는 흑임자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는데, 사워크림을 넣어서 만든 무화과 푸딩의 상큼함 덕분에 그냥 우유만 이용해서 만든 무화과 푸딩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부담 없이 묵직한 흑임자의 풍미를 즐길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올해, 가을의 새로운 즐거움 하나를 더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