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새겨진 익숙한 맛이 주는 안정감
아팠다.
지병을 앓고 있어서 아팠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한 번씩 이렇게 크게 앓는 때가 있다. 올해도 간당간당하게 선을 넘나들고 있었는데, 최근에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심리적으로도 안 좋아지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퍼져버렸다.
오랜만에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누워만 있었더니 하루하루가 꿈처럼 지나갔다. 낮보다 밤에 증상이 심하다 보니 오히려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낮에는 기절하듯 잠만 잘 때가 많았는데, 다음 주가 벌써 크리스마스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지난여름, 교통사고를 당한 후 좀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는 게 쉽지가 않다. 그나마 나는 몇 개월 고생 끝에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허리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암 수술의 여파로 몸 전체가 허약해져 있다 보니 허리 관련 치료도 차도가 거의 없어 결국 보험사와 합의 후 전반적인 치료를 받고 계시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 점점 악화하는 일상이 계속되니 이런저런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아픔 때문에 날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지고 사소하게 다투는 일이 잦아지면서 마음과 달리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많아졌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니 이런 흐름이 계속되는 게 참 답답했는데, 내가 크게 앓는 바람에 그 흐름이 조금은 끊어질 수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한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정말 목을 가누기도 힘들어서 하루 종일 땅만 보고 있는 날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어머니가 나를 위해 끓여주신 된장찌개와 밥을 한술 밀어 넣으니, 거짓말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쌀뜨물을 넣으셨는지 제법 톡톡한 국물이 입안에 스며들면서 구수한 풍미를 자아내고 뒤이어 가볍게 이어지는 고춧가루의 칼칼함이 밥을 먹는 기쁨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비린 맛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멸치가 발만 담근 듯 아주 은은하게 우려낸 멸치육수가 너무나 고맙고 단단한 찌개 두부 대신 넣은 부드러운 연두부가 정말 감사했다.
그래, 서로가 힘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왜 함께 힘든 사람에게 성질을 낼 수밖에 없었을까. 아직도 몸 상태는 여기저기 삐걱거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다시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허리가 안 좋으신데, 더 고생스럽게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야지, 나라도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지. 따뜻한 된장찌개 한술을 입안에 퍼넣으며 이번에도 잘 견뎠다고 생각했다. 함께 견뎌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째 11이 12로 바뀌어버린 연말의 달력을 바라보면서 마들렌도 다시 만들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도 많고 예민한 상황에, 오븐까지 말썽을 부리고 레시피도 문제가 발견돼서 골치가 꽤나 아팠는데, 답답한 마음은 한구석으로 밀어 두고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될 터였다.
요즘엔 마들렌을 만들기 위해 신나게 재료를 사고 난 뒤 귀신같이 몸이 안 좋아질 때가 많아서, 재료의 신선도가 아까워도 얼리거나 건조해서 겨울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냉동실 한가득 보관해 두곤 했는데, 이번엔 갑작스레 크게 아파서 결국 몇 가지 재료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다. 몸 상태가 제법 회복되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서 괜히 특별한 마들렌을 만들겠다며 재료를 샀다가 또 아플까 봐 오늘은 클래식 마들렌을 굽기로 했다.
근래에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던 오븐의 온도를 조정하고 레시피도 조금 손봤다. 아직은 밑불이 조금 강한 건지 생각보다 껍질의 색이 진하게 구워지긴 했지만, 오랜만에 퐁실하게 부풀어 오른 귀여운 마들렌을 마주하니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따끈따끈한 마들렌을 어머니께 하나 쥐어 드리고 나도 하나 들어서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속살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과하지 않고 은은하게 풍기는 레몬의 향과 버터의 진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제법 뜨거워진 입안을 차가운 우유로 진정시키고 아직은 표면에 바삭한 감이 살아있는 따뜻한 마들렌을 한 번 더 입안에 밀어 넣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인데 올해는 크리스마스 마들렌을 만들 수 있을까.
글쎄, 일단은 눈앞의 마들렌을 온전히 즐기는 게 먼저인 것 같다. 굳이 무리해서 마들렌을 만들다가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다시 힘을 내야지. 천천히 만들어보자.
다들, 편안한 크리스마스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