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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고 초콜릿 마들렌

흔들림을 즐기다 발견한 세상

by 거울새

오늘도 갑작스레 목이 간지러워서 정신없이 기침을 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몇 주째 앓고 있는 감기가 좀처럼 완전히 낫지 않고 있다. 이제는 갑자기 열이 나는 일도 없고, 잔기침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한 번씩 발작하듯 석탄처럼 매캐한 감기가 목을 간질이는 바람에 차마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연신 헛기침만 하다가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코로나19 이후 모든 호흡기 관련 전염병들이 진화라도 한 건지 유독 증상이 독하고 후유증도 오래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심한 고열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어렸을 땐 지구촌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진저리 쳐질 만큼 서로의 영향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요즘 경제적인 영향을 아주 심하게 받고 있어서 식재료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갈 때면 부쩍 오른 물가에 새삼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엔 마들렌을 만들 때도 재료의 가격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콜릿 가격 역시 2~3년 전에 비해 몇 배나 올라버려서 밸런타인데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사실 우리 집엔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특히 어머니께선 확고하게 초콜릿을 선호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안 그래도 초콜릿을 이용한 마들렌을 만들 때면 많은 고민이 들었는데, 초콜릿 가격마저 부쩍 오르니 덩달아 고민도 깊어졌다. 그러다 문득 정월 대보름을 맞아 만들어 보려던 대추고가 떠올랐다.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해서 어린 시절부터 머릿속 깊이 박혀 있던 오래된 드라마 제목도 하나 떠올랐다. 대추고다. 올해는 대추로 밸런타인데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겠다. 어차피 초콜릿은 기존에 사용하던 게 남아있으니 크게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과는 제법 거리가 먼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라는 말을 소리 없이 읊조렸다. 그렇게 올해 밸런타인데이에는 대추고 초콜릿 마들렌을 만들게 되었다.


대추고 만들기는 마른 대추를 씻는 일부터 시작한다. 표면이 쪼글쪼글한 마른 대추는 껍질 사이사이에 의외로 먼지가 많이 끼어있어서 칫솔을 이용해 잘 닦아내는 편이 좋다. 대추고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추씨를 함께 고아 낼 생각이면 굳이 씨를 발라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뭉근하게 풀어진 대추 속살을 파헤치면서 대추씨를 골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추를 깨끗하게 씻은 뒤엔 적당량의 물을 넣고 천천히 고아 내면 된다.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대추고가 묽어져서 수분을 날리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물을 너무 적게 넣으면 대추가 타면서 쓴맛이 날 수 있으므로 적당히 물을 넣고 완전히 졸아들지 않도록 자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고아 낸 대추는 씨를 골라낸 뒤 믹서로 곱게 갈아 체에 한 번 내려주면 완성이다. 대추고는 그 자체로 당도가 충분히 높지만, 만약 대추고에서 씁쓸한 뒷맛이 거슬리게 난다면 설탕을 넣어 쓴맛을 잡아줘도 된다. 보통 대추 자체의 문제나 만드는 과정상의 문제로 쓴맛이 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마른 대추 자체에도 특유의 쓴맛이 있으므로 설탕을 조금 넣는 게 속 편한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대추고는 은근 한약 맛이 나는 듯하면서도 고급스럽고 오묘하게 녹진한 단맛을 가지고 있었다. 복합적인 달콤함이 마치 토피나 캐러멜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서 초콜릿과도 제법 좋은 궁합을 이룰 것 같았다.



사실 대추고 초콜릿 마들렌은 필링 없이 완성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들렌을 굽고 나니 반죽을 완성하고 느꼈던 대추고의 선명한 존재감이 너무 흐릿해져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대추고에 생크림을 더해 필링을 만들었는데, 되레 너무 만족스러운 마들렌이 완성됐다. 초콜릿과 대추가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마치 한동네에서 어울려 자란 듯 자연스레 어우러져서 대추를 선호하지 않는 어린이도, 초콜릿과 데면데면한 어르신도 다 함께 즐길 수 있을 만한 고급진 단맛이 느껴졌다.


요즘은 기존에 사용하던 재료 중 가격이 급등한 재료가 많아서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바꿔 말하면 오히려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저렴한 재료를 응용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대추고란 재료를 재발견한 것처럼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외부 환경이 내 삶을 흔드는 걸 피할 수 없다면, 기왕 흔들리는 거 좀 더 즐거운 쪽으로 흔들려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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