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양의 푸릇한 만남
요즘 마트는 여름맞이가 한창이다. 마트 한구석엔 아직도 봄나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마트 입구는 수박과 참외를 비롯한 여름작물들이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봄 수박이 은근 유행이라 봄에도 작은 수박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제는 제법 씨알도 굵고 선명한 줄무늬를 가진 짙은 녹색의 수박이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 집도 이미 올해 첫 수박을 한 통 깔끔하게 비우고, 작년 여름 이후 한동안 잊고 있던 참외 사라다를 밥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가끔 벌써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한낮의 온도가 높아지는 날엔 냉장고에서 한껏 차가워진 달콤한 수박을 한입 가득 베어 물며 시원함을 만끽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수박이나 참외의 상큼하고 시원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녀석이다.
바로 완두콩이다.
여름은 시원한 수박과 참외 그리고 달콤한 복숭아나 새콤한 자두 같은 과일의 천국인 계절이지만, 또 하나 완두콩처럼 구수하고 달큰한 콩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이 다가오면 푸릇푸릇한 완두콩을 시작으로 강낭콩, 누에콩 등 각종 콩이 줄지어 출하되기 시작한다. 콩은 보통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건조 후 한해 내내 균일하게 유통되지만, 건조되지 않은 제철 콩은 건조 콩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완두콩은 여름이 완전히 무르익기 전 시장에 나오기 시작해, 푸릇푸릇하고 고소한 풍미로 여름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작년엔 완두콩을 마트에서 딱 한 번 밖에 못 보고 지나갔는데, 올해는 5월이 되자마자 마트에 얼굴을 비추었길래 얼른 한 봉지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철 콩은 건조 콩과 달리 물에 불리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그대로 물에 데치거나 삶아서 원하는 방식으로 먹으면 되는데, 별다른 조리 과정 없이 소금만 적당히 넣어서 삶아도 상당히 맛이 좋다. 은은한 달큰함과 가볍고 고소한 감칠맛 그리고 약간의 푸릇함까지. 사실 완두콩을 제철에 직접 구매해서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마치 초여름의 푸른빛을 그대로 담아 놓은 듯, 입안 가득 퍼지는 완두콩의 달큰 짭짤한 맛에 새삼 놀랐다. 아마 이번 여름엔 마트에서 완두콩을 마주칠 때마다 열심히 사 먹지 않을까. 역시 이렇게 맛있는 재료를 마들렌에 사용해 보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게 오늘 만든 마들렌은 완두콩 치즈 마들렌이다.
소금만 적당히 넣고 5분 정도 삶은 완두콩은 곱게 갈아서 체에 내렸다. 콩으로 앙금을 만들 땐 껍질을 벗기기도 하지만, 완두콩은 껍질째 곱게 갈아 체에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드러운 앙금 맛을 느낄 수 있다. 가장 편한 건 완두콩 앙금으로 필링을 만들어 마들렌을 채우는 형태겠지만, 워낙 원물의 맛이 좋다 보니 마들렌은 좀 더 색다른 형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들렌 반죽에 완두콩 앙금을 적당히 섞어 맛을 내고, 완두 튀김을 마들렌 위에 잔뜩 올려 바삭함 식감과 완두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완두 튀김은 완두콩에 찹쌀가루를 묻혀 한번 쪄낸 뒤 식혀서 튀겨내는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과정은 다소 번거롭지만, 완두콩의 맛에 기름의 고소함까지 더해져 상당히 위험한 맛이 났다. 마지막 킥으로 준비한 건 바로 치즈. 소금만 넣고 삶아낸 완두콩의 풍미가 워낙 강렬하게 남아서 짭짤한 감칠맛을 좀 더하고 싶었는데, 냉동실에 있던 파르메산 치즈와 페코리노 치즈가 떠올랐다. 완두 튀김 위에 하얀 눈처럼 뿌려주면 아마 강렬한 짠맛과 진한 감칠맛으로 완두콩 마들렌의 맛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푸릇한 연둣빛 속살 위로 눈이 온 듯 새하얀 치즈를 소복하게 덮은 완두 튀김이 제법 귀엽게 느껴지는 마들렌이 완성됐다. 한입 베어 물자마자 강하게 혀를 울리는 짭짤한 감칠맛 뒤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달큰하면서도 고소한 완두콩의 맛이 이어졌다. 끝에 느껴지는 다소 퍽퍽한 콩의 맛은 희미했고, 쨍! 하게 혀를 울리며 입장한 치즈는 완두콩의 고소한 맛과 함께 어우러지며 향긋한 풍미로 그 모습을 바꿔나갔다. 맛에서는 불만이 전혀 없었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면 바로 완두 튀김의 식감. 갓 구워냈을 땐 바삭함이 살아서 맛이 좋았는데, 너무 빨리 눅어지는 데다 시간이 갈수록 완두콩 표면이 다소 질깃해져서 은근 입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곧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먹기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여름은 분명히 덥고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여름이 없는 한 해는 상상하기 힘들다. 올해 여름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