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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 마들렌

초여름의 달콤함

by 거울새

밤이면 불어오던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미적지근해지더니, 이제는 저녁 산책길에도 순간 찹찹한 바람이 불어 후드를 뒤집어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아직도 나는 가정용 난방 텐트 안에서 잠을 자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요 며칠 부쩍 기온이 많이 올랐다. 며칠 전엔 왠지 텐트 안 공기가 좀 답답한 것 같아서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아침을 먹고 인터넷을 보니 그날은 1907년 이후 가장 더운 5월의 아침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제법 쌀쌀한 공기가 가득해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면 몇 주는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계절은 여름의 문턱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마트에서도 이미 여름이 한창이다. 푸릇한 열무와 시원한 오이가 얼마 남지 않은 봄나물의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짙푸른 수박부터 참외를 비롯한 생전 처음 보는 각종 멜론 그리고 블루베리와 산딸기, 오디 등 다양한 초여름 과일들이 이제는 조금 밍숭맹숭해진 마지막 딸기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집 밥상 위에도 비교적 빠르게 여름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선 열무김치라 불리는 ‘열무 물김치’가 우리 집 여름 밥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미 5월이 되자마자 올해 첫 열무김치가 독보적인 시원함으로 우리 집 밥상 위를 강타했고, 따뜻한 우동과 칼칼한 라면의 자리는 어느새 시원한 열무국수와 매콤한 비빔냉면이 차지했다.


여름을 맞아 시장에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여름작물이 등장하는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체력적 한계가 명확하다 보니 한편으론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수많은 식재료 속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미처 맛보지 못했는데, 이미 제철이 지나버린 재료들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제철 재료라도 감사히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주에 선택한 재료는 바로 ‘오디’.


그렇게 오늘은 오디 마들렌을 만들었다.


오디는 뽕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말한다. 비단을 생산하는 누에의 주 먹이가 뽕잎이었기에 예전엔 뽕나무를 키우는 농가가 많아 오디는 그냥 길에서 공짜로 따먹는 열매였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양잠 산업의 몰락과 함께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가가 거의 사라졌고, 열매 자체가 무른 탓에 유통도 쉽지 않아 한동안 시장에서 그 모습을 찾기 힘들었는데, 최근 건강 과일로 재조명받으면서 제철에는 생과의 형태로도 짧게나마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오디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태어나서 한 번도 오디 생과를 먹어본 적이 없는 데다 예전에 그렇게 흔했다는 오디의 맛이 은근 궁금하기도 해서 마침 우연히 마주친 오디 생과를 올해는 쉽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데려온 오디는 사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었다. 블루베리와 비슷하면서도 명확하게 가라앉은 맛. 달콤보다는 달큰이 어울리고 새콤보다는 약간의 산미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블루베리에 비해 몇 톤은 흐릿한 채도를 가진 느낌에 푸릇한 채소의 향미가 살짝 감돌아서 왠지, 약방에서 과일을 만난 듯했다. 기대가 많았던 탓일까. 무화과와의 첫 만남이 아른거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애꿎은 생과만 자꾸 집어 먹었는데, 먹다 보니 비교적 은은한 풍미도 그리 나쁘진 않았고, 개중에 좀 더 선명한 아이도 있었다.


오디는 보통 잼으로 많이 먹는데, 그러면 오디의 특색이 많이 퇴색될 것 같아서 최소한의 설탕만 넣고 전자레인지에서 수분을 날렸다. 뒤이어 응축된 풍미 속에 은근히 내비치는 풀 향을 잡기 위해 브랜디를 아주 찔끔 넣고, 설탕과 레몬즙도 살짝 더해서 수분을 조금 더 날려주니, 포도와 블루베리 사이 어딘가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제야 오늘 만들어야 할 마들렌이 얼추 머리에 들어오는 듯했다. 오디 필링의 맛을 살리기 위해 마들렌 반죽의 단맛을 조금 줄였다. 그리고 오디가 마치 자신의 상큼함인 양 뽐낼 수 있도록 유자청에서 유자 껍질을 아주 조금만 건져서 곱게 다져 반죽에 섞어주었다.



그렇게 완성된 오늘의 마들렌. 오디 필링을 원 없이 채워 넣은 만큼 터질 듯 부푼 마들렌의 배꼽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오디 특유의 은은한 달큰함이 응축되어 제법 진한 달콤함이 느껴졌고, 채소를 연상시키던 푸릇한 풀 향의 자리는 은은한 유자의 상큼함이 대신했다. 쨍하진 않지만 제법 선명한 초여름의 맛. 부쩍 더워진 날씨에 벌써 지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런 여름의 맛이라면 기꺼이 함께 무더운 여름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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