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악몽의 화려한 변신
작년엔 거의 처음으로 포스팅을 포기했던 마들렌이 있었다. 완두콩을 사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대신 구매했던 울타리 콩으로 만든 마들렌. 울타리 콩. 태어나서 처음 보는 콩이었다. 강낭콩의 일종으로 울타리를 타고 자라나는 종류를 통틀어서 울타리 콩이라 부른다고 했다. 강낭콩은 곧잘 앙금을 만드는 품종이었기에, 별생각 없이 울타리 콩 앙금으로 여름 콩 마들렌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한 여름밤의 악몽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지금도 뭐가 문제였는진 잘 모르겠다. 일단 콩이 좀처럼 익지 않았다. 20분 정도면 익겠다고 생각했던 콩은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부드럽고 포슬포슬하게 으깨지는 느낌 없이 서걱거렸고, 익은 게 맞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게다가 왠지 쿰쿰하게 비릿한 냄새도 있어서 은근히 거슬리는 그 맛을 어떻게 해도 지워낼 수가 없었다. 당시엔 매실로 그 맛을 좀 잡아볼 생각이었는데, 결국 너무나 애매한 매실 앙금이 완성되었고, 많은 고민 끝에 거의 처음으로 마들렌 기록 자체를 폐기했었다. 근데, 얼마 전 완두콩을 사용한 이후 워낙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울타리 콩이 떠올랐고, 작년 여름 이후 1년 가까이 냉동고에 봉인되어 있던 울타리 콩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작년에 그렇게 처참한 실패를 겪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일단 쿰쿰한 냄새를 해결하기로 했다. 원래 콩을 너무 오래 삶으면 메주 냄새가 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토대로 오래 삶은 게 문제였다는 가설을 세웠다. 콩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아미노산이 발효 콩 특유의 쿰쿰한 냄새를 유발하며 열분해로 인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그래서 이번엔 완두콩처럼 10분 이내의 짧은 시간 동안 콩을 삶았다. 그 결과, 익혀도 익혀도 서걱했던 식감은 여전히 서걱거렸지만, 분명 덜 익어서 비릿한 맛은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 사라지지 않던 쿰쿰한 냄새가 사라졌다. 완두콩의 달큰한 맛에 비하면 콩 자체의 향이 상당히 진했지만, 나름 구수한 맛이 감돌았고 앙금을 만들어 봐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앙금을 만들면 곱게 갈아 체에 내리는 과정을 거치니까 서걱거리는 식감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곱게 간 울타리 콩은 고운 체에 한 번 걸러냈고 완두콩 앙금처럼 소량의 설탕과 아주 조금의 생크림을 섞어주었다. 혹시나 콩 맛이 너무 강할까 봐 올해는 매실 대신 세 가지 과일을 따로 준비해 뒀는데, 이게 웬걸. 완두콩 앙금만큼이나 달콤하면서 고소한 감칠맛이 도는 매력적인 아이가 불쑥 입에 들어왔다. 귀신에 홀린 걸까. 분명 완두콩 앙금이 좀 더 내 취향에 가까웠지만, 강한 콩 맛도 쿰쿰한 향도 거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준비해 둔 딸기와 오디 그리고 블루베리를 각각 섞어 맛을 보니 마치 대학생 무렵 한창 유행했던 일본식 찹쌀떡 속 과일 앙금처럼 각 과일 특유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구수한 앙금이 느껴졌다. 이거다. 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딸기와 초여름의 오디 그리고 한여름의 블루베리 맛을 담은 마들렌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반죽에는 유자청을 살짝 넣어 상큼한 맛을 살리고 새콤달콤한 세 가지 앙금을 가득 넣은 마들렌을 만들었다.
그렇게 오늘, 울타리 콩으로 만든 마들렌은 바로 베리콩 마들렌이다
향긋하고 달콤한 딸기의 풍미가 가장 선명했지만, 은근한 산미와 진한 향기가 달큰하게 풍기는 오디 그리고 은은한 단맛의 블루베리도 존재감이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각자의 맛이 제법 뚜렷했는데, 함께 먹으면 또 함께 먹는 대로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어울려서 베어 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마들렌에서 풍겨오는 아주 연한 유자 향이 콩 앙금 특유의 미묘한 텁텁함을 은근히 가려줘서 과일 앙금의 상큼함을 한층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똑같은 콩으로 만든 앙금인데, 미묘한 향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결과물을 만들었다. 왠지 사람의 인생이 떠올랐다. 같은 인생도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되지 않을까. 심지어 동일한 상황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건 분명 자기 자신뿐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나의 삶을 덮어버리진 말아야지. 이번 여름엔 상큼한 과일 앙금처럼 나의 마음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나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