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도토리묵 마들렌

우리 산이 나눠준 맛

by 거울새

어렸을 땐, 어머니께서 집에서 손수 도토리묵을 쑤어 주셨다. 어머니는 도토리묵에선 모름지기 깔끔한 맛이 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시판 묵은 도토리의 진한 맛을 강조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쓰고 떫은맛이 났지만, 어머니의 묵은 달랐다. 떫고 쓴 잡맛을 잡기 위해 수차례 물을 갈며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셨고, 불 앞에서 쉬지 않고 저어가며 특유의 식감을 내기 위해 노력하셨다. 그렇게 완성된 어머니의 묵엔 씁쓸한 맛 대신 맑은 고소함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씹을수록 담백한 도토리의 풍미가 은은하게 퍼졌다. 무엇보다 부들부들하면서도 찰진 탄력이 유난히 좋았다. 입에선 매끄럽게 넘어가는 그 식감이 정말 일품이었다. 지금도 갓 쑤어낸 묵을 투박하게 무쳐낸 도토리묵무침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어머니도 묵을 쑤지 않으시고, 요즘은 도토리묵을 먹은 기억 자체도 가물가물하지만, 이따금 그 순수하고 말랑한 맛이 떠오르곤 했다.


꽤 오래전 도토리묵을 이용해 마들렌을 구운 적이 있다. 당시엔 꿀로 은근한 단맛을 내고 한라봉 필을 다져 넣어,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의 필링을 만들었는데, 그 맛이 제법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2년 전, 한국 고유의 재료로 만든 마들렌을 고민하던 중, 도토리묵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도토리묵을 다른 형태로 이용할 순 없을까? 그러다 우연히 묵말랭이 튀김이란 걸 발견했다.


도토리묵을 말리면 ‘묵말랭이’가 된다. 푸딩같이 부드러운 묵은 제 안의 수분이 빠져나가면 고기처럼 쫄깃해진다. 보통 묵말랭이는 다시 물에 불려 각종 양념을 더해 볶아 먹거나 잡채, 무침 등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쓰인다. 그런데 이를 물에 불리지 않고 그대로 기름에 튀겨내면 마치 과자처럼 바삭한 식감이 된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이거다 싶었다. 묘하게 추로스 같은 맛이라는데, 이 바삭한 조각들을 반죽 위에 올려 구우면 더없이 독특한 도토리묵 마들렌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표면에 설탕과 계핏가루를 묻혀 단순히 추러스를 흉내 낸 것만으론 못내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해를 코앞에 둔 얼마 전이었다. 지난해 만든 마들렌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문득 잊고 있던 도토리묵이 떠올랐다.


그래, 도토리묵을 쓰려고 했었지.


지난봄에 만들어 두었던 고로쇠 시럽을 묵말랭이 튀김에 곁들이면 어떨까? 도토리묵의 쌉싸름한 맛에 묘하게 청량감이 감도는 달달한 고로쇠 시럽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우리 산을 담아낸 듯한 멋진 마들렌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고로쇠 도토리묵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도토리묵은 얇고 길쭉하게 잘라 직접 말려도 좋고, 시판 제품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180도로 가열한 기름에 묵말랭이를 넣으면, 표면에 새하얀 꽃이 피어오르듯 한결 연한 빛깔의 껍질이 묵말랭이를 감싸 안는다. 약간 노릇노릇할 만큼 수십 초 정도만 가볍게 튀겨서 건져내면 된다. 갓 튀겨낸 묵말랭이는 마치 속이 텅 빈 듯 가볍고, 놀라울 만큼 바삭한 식감을 자랑했다. 더없이 경쾌하게 부서지는 파삭함 속에 도토리 특유의 진한 구수함을 품고 있었다. 뒤이어 쌉싸름한 감찰맛이 혀끝을 감싸는데, 본래의 밑간 덕분인지 별다른 양념 없이도 짭짤한 맛과 은근한 산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면 마들렌의 묵직한 맛에 묻혀 다소 밋밋해질 것 같아서, 고로쇠 시럽을 겉면에 입혀 강정처럼 만들었다. 반죽에는 고로쇠의 은근한 단맛을 살리되 상쾌한 포인트를 주기 위해 생강가루를 아주 살짝 섞어주었다. 그렇게 도토리묵 강정을 잔뜩 올린 고로쇠 도토리묵 마들렌을 완성했다.



마들렌을 입에 넣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맛있다’였다. 묵말랭이 튀김만 먹었을 땐, 시판 제품을 써서 그런지 쌉쌀하고 짭조름한 감칠맛이 쨍하게 느껴졌는데, 마들렌의 풍미가 그 날 선 맛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모든 맛이 생각보다 은은해서 눈을 감고 천천히 음미했다. 고로쇠 시럽의 달큼함과 마들렌의 농후한 풍미가 자연스레 뒤섞였다. 어찌 보면 무난한 맛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청량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고소함이 있었다. 언뜻 스쳐가는 생강의 따뜻함과 바삭하면서도 군데군데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묵말랭이의 쫄깃함, 그리고 입에 남은 구운 떡 같은 여운까지. 우리 산이 내어준 인자한 맛에 점점 빠져들었다. 평범하면서도 묘하게 생소한 풍미의 향연 속에 올해도 만들어야 할 마들렌이 무척이나 많겠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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