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과자에 피어난 우리 맛
누가는 머랭에 꿀과 견과류를 섞어 굳힌 과자다. 아랍 지역에서 유래하여 유럽으로 전해지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그중 프랑스식 전통 과자로 자리 잡은 것이 누가다. 쫀득하고 밀도가 높은 식감이 특징으로 꿀의 양이나 가열 온도에 따라 엿처럼 딱딱한 것부터 캐러멜처럼 부드러운 것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보통 피스타치오나 아몬드를 섞어서 만드는데, 꿀의 깊고 진한 단맛과 견과류의 고소함이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고급스러운 풍미를 자아낸다. 얼마 전엔 책에서 우연히 ’대추고 누가’를 보았는데, 마치 이번 마들렌을 위해 그 단어가 준비된 것만 같았다. 대추고에 누가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진다면, 초콜릿만큼이나 완벽한 궁합을 이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는 소량만 만들기가 힘들었다. 누가를 잔뜩 만들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득해졌다. 작년에 쓰고 남은 대추고를 활용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데, 혹을 떼려다 되레 혹을 붙이는 격이 될지도 몰랐다. 아이디어는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문득, 마시멜로가 떠올랐다.
몽블랑 마들렌을 고민하며 자료를 찾을 때, ‘쫀득 쿠키’ 영상이 자주 눈에 띄었다. 얼핏 보기에 누가와 질감이 흡사해 보였는데, 그걸 응용하면 약식으로나마 누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집에 마시멜로가 딱 2알 남아 있었다. 무게를 슬쩍 재어보니, 대추고와 각종 재료가 더해지면 빠듯하게 마들렌 2개 분량의 필링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반죽이었다. 필링에 힘을 너무 많이 주다 보면, 되레 반죽을 구상하기가 어려워진다. 반죽까지 화려해지면 자칫 맛이 너무 난잡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피를 넣는다면 분명 무난히 잘 어울리겠지만, 그건 역시 너무 평범했다. 게다가 대추고와 누가가 뒤섞이며 충분히 다채로운 풍미를 자아낼 것이기에, 추가적인 향신료로 맛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었다. 대추고의 복잡 미묘한 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혹시 모를 단점을 보완해 줄 만한 요소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은 바로 ‘모과’였다. 얼마 전 모과 치즈를 만들고 나머지 모과로 정과를 만들었는데, 그때 남은 시럽이 있었다. 모과의 산미와 떫은맛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럽이라면, 자칫 너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대추고 누가의 맛을 한결 가볍게 밀어 올려 줄 것 같았다. 거기에 만체고 치즈를 더하면, 과한 단맛을 막으면서도 고소한 감칠맛까지 잡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반죽에는 모과 시럽을 넣고, 반죽 표면에는 곱게 갈아낸 만체고 치즈를 한 겹 뿌렸다. 완성한 마들렌에는 모과 시럽을 살짝 희석해서 연한 글라쎄를 발라줬다. 모과는 절대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그저 뒤에서 주인공이 좀 더 선명하게 빛나도록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대추고 누가는 전자레인지로 빠르게 완성했다. 녹인 버터에 마시멜로를 넣고 아주 짧게 가열한 뒤, 따뜻한 상태의 대추고와 견과류를 섞었다. 견과류는 대추고와 합을 맞춰 한국적인 정취를 더해줄 잣과 호두를 잘게 다져 준비했다. 거기에 꿀을 살짝 더해 누가 특유의 풍미를 입혔다. 그렇게 대추고 누가 마들렌이 완성되었다.
대추고 누가의 맛은 예상대로 무척 풍부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저 깊은 맛을 지닌 대추 캐러멜이었지만, 그 속엔 더없이 넓은 맛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버터의 부드러운 지방 맛이 대추고의 쌉싸름한 맛을 감싸 안으며 한층 인자한 풍미를 자아냈고, 묵직한 대추고와 향긋한 꿀이 뒤섞이면서 진한 단맛의 박물관에 도착한 듯 다채로운 단맛의 면모를 드러냈다. 입안 곳곳에서 씹히는 호두와 잣 덕분에 연신 기분 좋은 고소함이 터져 나왔고, 있는 듯 없는 듯 이따금 스치는 모과와 만체고 치즈의 은은한 존재감도 제법 근사했다. 가장 의외의 재미를 준 건 마시멜로였다. 전자레인지에서 가열되며 작게 뭉친 표면의 조직들이 아주 조금 남아서 마치 머랭처럼 파사삭 부서지는 식감을 선사했는데, 종종 느껴지는 그 식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전통 과자에 또 다른 전통 과자를 더한, 그야말로 유럽의 뿌리가 새겨진 과자였으나 대추고의 존재 하나만으로 어느새 우리의 땅 위에 선 우리 과자가 되었다. 영락없는 우리의 맛. 사실 대추고가 그리 대중성 있는 재료는 아니지만, 그 안에는 실로 엄청난 잠재력이 숨어 있다. 역시 우리의 맛을 되돌아보는 일은 즐겁다. 올해는 우리나라 특유의 맛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