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검병 마들렌

옛 우리 과자의 맛

by 거울새

사람들은 흔히 체력이 떨어졌다고 하면, 으레 쉽게 지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체력이 떨어졌을 때, 금방 지치는 건 일부의 증상에 불과하다. 우선, 기본적인 행동이 느려진다. 그리고 정상일 때에 비해 훨씬 빨리 지친다. 가장 문제는 회복이다. 보통 체력이 떨어지면, 회복도 오래 걸린다. 어찌 보면 배터리가 고장 난 기계와 흡사한 상태가 된다. 게다가 둔해지는 건 신체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머리를 사용할 때 많은 체력을 쓴다. 결국,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동일한 증상을 겪게 된다. 상황이 이쯤 되면, 그건 더 이상 체력 저하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한 상태가 된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슬로 모션 효과가 자신에게만 적용된 듯, 마치 거북이처럼 모든 행동이 지체된다. 그 속에서 빠른 건 오로지 체력이 고갈되는 일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작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기분이다. 요즘엔 지난 연말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속으론 괜찮다고, 설날부터 올해의 시작이라고, 열심히 되뇌고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일상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주에 한 번 글을 쓰고 마들렌을 만드는 일조차 벅찼다. 하지만 매일 아주 짧게라도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음식과 관련된 책은 빠지지 않고 들춰보려 했다. 꼭 디저트와 관련이 없더라도,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영감이 떠오를 때도 있었고, 힌트를 얻을 때도 많았다. 가장 최근에 살펴본 책은 임원경제지 정조지 편인데, 거기서 우연히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방검병’


바로 곶감 단지의 원형이다. 곶감 단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 번쯤 ‘방험병’이란 이름을 들어 봤을 것이다. 예전엔 관련 자료를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는데, 임원경제지에 ‘방검병’이란 이름으로 방험병이 실려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을 통해 찾아보니 증보산림경제에 수록된 명칭 역시 ‘방검병’이 맞았다. 어쨌든 곶감 단지의 원형이긴 했지만, 제조법이 조금 달라 언젠가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방검병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방검병은 사실 곶감, 호두, 대추, 밤을 모두 곱게 갈아낸 뒤 꿀과 섞어 만든다. 이걸 햇볕 아래서 바짝 말려 완성하는데, 겉은 단단하지만 입에 넣으면 녹아내리는 독특한 식감을 가졌다고 한다. 물론 이 방식 그대로 만들어야 진정한 방검병이 되겠지만, 그 방법으론 오롯한 맛을 마들렌에 담아내기 힘들 것 같아 현대적인 재해석을 더해 나만의 방검병을 고민해 보았다.


목표는 방검병 느낌의 필링이었다. 우선, 베이스를 청도반시로 잡기로 했다. 곶감 단지의 원형인 만큼 감의 맛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수분을 날린 청도반시에 찐 밤을 가루 내 섞고 아주 곱게 갈아 페이스트 형태를 만들었다. 모든 재료를 다 갈아내면 식감이 너무 밋밋할 것 같아, 호두와 대추는 바삭하게 구워낸 뒤 적당한 크기로 다져 준비했다. 또한 청도반시 일부를 마치 곶감 같은 질감이 날 때까지 말려 새끼손톱 반만 하게 잘라두었다. 모든 재료를 다 섞은 뒤, 꿀을 더해 맛을 보고 필링을 완성했다. 필링이 너무 되직하면 목이 멜 것 같아서 버터를 소량 섞어 한층 부드러운 맛도 추가했다. 마들렌 반죽에는 곶감 단지를 만들면서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계핏가루를 넣어 향을 냈고, 흑설탕을 섞어 진한 맛을 살렸다.

그렇게 완성된 방검병 마들렌. 얼핏 보면 곶감 단지랑 비슷해 보이는데, 맛은 사뭇 달랐다. 유자청이 빠진 만큼 산미는 전혀 없고 아주 묵직한 풍미가 느껴졌는데, 대신 호두 정과가 없어서 뒷맛이 상당히 깔끔하게 떨어졌다. 밤 가루를 적당히 넣은 덕에 아주 구수하면서도 녹진한 맛이 났고, 감의 맛이 선명하게 살아나 마치 감으로 만든 아주 진득한 캐러멜을 베어 먹는 기분이 들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과자 같은 식감을 살린 대추는 연신 바삭거리며 상당히 매력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보통 옛날이라 하면 떡 말고는 딱히 먹을만한 간식이 없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우리나라엔 상상 이상으로 먹음직스러운 다과가 많았다. 볼수록 참 놀랍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우리의 문화를 너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종종 기회가 될 때마다 부지런히 과거의 유산을 새롭게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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