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초콜릿 마들렌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

by 거울새

어쩌면 사람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계획이란 건 미미한 변수에 의해서도 쉽게 틀어질 수 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은 처음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때보다 찰나에 생긴 아주 작은 일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언제나처럼 삶은 마음 같지 않다.


잠깐의 부주의로 일어난 지난 주말의 사고 역시 내 삶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통증에 문득문득 움찔거리는 때가 많았다. 자연스레 행동에 제약이 생겼고, 점차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종종 잠을 설쳐서 아침엔 몽롱했고, 체력적으로도 쉽게 지쳤다. 마음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향할 곳 없는 못난 마음이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다. 한순간의 실수에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내 마음이 미약하나마 성장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걸까. 예전 같으면 속상한 기분에 부아가 잔뜩 치밀어 애먼 곳에 화풀이했을 텐데, 지금은 화난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아직은 미숙해서 그 화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여유까진 갖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이제 대화의 여지가 있었다.


화가 난 너를 이해한다.

내가 너를 이해해.


아무도 보지 않는 메모장에 평소 같으면 누가 볼까 봐 찜찜해서라도 적지 못했을 법한 욕들을 잔뜩 적어 내렸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를 조금이나마 털어버렸다.


이번 주엔 어떤 마들렌을 만들까. 사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초콜릿 마들렌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올해는 설 연휴가 밸런타인데이와 딱 붙어 있는 터라 벌써 일주일이나 시간이 지났다. 굳이 나와 관계도 없는 기념일을 매년 기념할 이유는 없었기에, 괜한 일을 하는가 싶었다. 분명 더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이 뒤틀린 마음이 문득 태클을 걸었다. 적절한 시기가 지났다고 초콜릿을 사용할 가장 좋은 핑계를 놓칠 이유가 있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그냥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진득한 초콜릿 마들렌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고추장 초콜릿 마들렌을 만들었다.


초콜릿은 고추장을 이용해 마들렌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떠올렸던 여러 부재료 중 하나다. 매운맛을 더한다고 하면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재료지만, 멕시코에는 초콜릿과 말린 고추 등 20~30가지의 재료를 섞어 만드는 ‘몰레 소스’라는 전통 소스가 있다. 멕시코의 국민 소스 중 하나로 불릴 만큼 대중성이 있는 데다, 히스패닉 인구를 통해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려 생각보다 훨씬 폭넓은 사랑을 받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몰레 소스를 따라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초콜릿에 고추장의 매콤함을 더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고추장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얼마 전 강민구 셰프님의 ‘장’이라는 저서에서 우연히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고추장 파우더’를 만드는 것. 고추장을 얇게 펴서 말려주기만 하면 돼서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다. 카카오 파우더와 다크 커버춰를 섞어 아주 진한 풍미를 더한 마들렌에 소량의 고추장과 완성된 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들면, 쌉쌀한 초콜릿 맛 뒤로 은근한 매콤함이 감도는 매력적인 맛을 낼 수 있으리라.


물론, 과정은 역시나 마음 같지 않았다.


사용한 고추장에 전분이 많은 탓인지, 말린 고추장은 좀처럼 딱딱해지지 않았고, 파우더로 갈아내기엔 조금 질깃했다. 결국 절구를 꺼내 물리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고, 고생 끝에 아주 어렵사리 반죽을 완성했다. 반죽 위엔 해바라기씨와 호박씨를 다져 올려 오독오독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를 살렸고, 건 크랜베리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자칫 묵직할 수 있는 맛에 상큼한 포인트를 주었다.



평범하게 묵직한 초콜릿의 쌉쌀하고 달콤한 맛 뒤에 은근히 끓어오르는 열감이 느껴졌다. 마치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속은 부글대던 내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선명한 매콤함이 뒷맛을 자극했다. 오독한 식감의 견과류들이 자아내는 고소함과 이따금 퍼지는 크랜베리의 산뜻함이 다소 무거운 풍미를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래, 깔끔한 뒷맛을 선사하는 고추장의 매콤함처럼 단순한 화가 아니라 뜨거운 열정으로 승화시켜 깨끗하게 마무리하자. 분노를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올해도 버텨내자. 가만히 끓어오르는 나의 마음을 다시금 다독이며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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