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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Jan 10. 2020

공포와 영원 사이의 불안정한 외줄타기

─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At Eternity's Gate)》




※ 저의 영화 리뷰에는 스포일이 항상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바랍니다.









 개봉 전부터, 영화의 제목을 접했을 때부터,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였다.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예술적 감각과 배우와 실제인물 사이의 그 싱크로율이란! 하지만 일정이 쉬이 나오지 않아 생각보다 꽤나 늦게 영화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컨디션 난조라는 악조건 속에서, 게다가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광고를 오래하면서 영화시작시간을 15분은 훌쩍 넘겨버리는 짜증나는 상황속에서, 나는 새까맣게 불이 꺼진 영화관에서 조용히 스크린에 시선을 던졌다. 





그림은 이미 자연 안에 있어. 꺼내주기만 하면 돼.



 영화의 시작 ─ 한 여인에게 말을 거는 '내'가 있다. 1인칭 시점의 카메라 촬영으로 인해 마치 내가 말을 걸고 다가가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우리'는 스케치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 속에 속하고 싶다고 나레이션 한다.








 이 영화를 감상하려면 고흐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필요할 듯 하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고흐가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나는 즈음부터 그의 생의 마지막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고, 고흐의 심리적 묘사에 있어서는 더더욱 친절하지 못하다. 적어도 영화의 초중반까지 우리가 고흐를 이해하기엔 꽤 힘에 겨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영화 전반에 사용되는 1인칭 시점 촬영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화면은, 가뜩이나 명쾌하게 이해가 안되서 울렁거리는 우리의 속을 더욱 뒤틀리게 할지도 모른다.








 특히 초중반에 아를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을 탐닉하는 고흐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조금 지리하고 난해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반 이후, 고갱과의 대화, 의사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그 때 그 지리한 장면들이 고흐의 어떤 마음을 보여주었는가를 뒤늦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 그리고 이 말은, 초중반을 관람하는 것은 혹자들에게는 꽤나 고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불친절한 영화 초중반을 잘 견디어 내고 나면, 우리는 고흐의 대사를 통해 고흐의 불안감과 고흐의 예술관을 조금씩 엿볼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자연을 헤매고 다니고 흙을 얼굴에 갖다대었던 심정이 무엇이었는지 더욱더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여러번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과연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떠나는 고갱에게 자신의 귀를 잘라내었던, 고흐 자신조차도 두려워했던 또다른 고흐라는 인격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불안감과 공포와, 때로는 불쾌함은 그가 보았던 세상을 대변해주는 것일까?






난 슬픔 속에서 기쁨을 느껴요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다시 느껴졌던 점은, 저렇게 나약하고 불안정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힘 있는 그림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흐의 그림에서 강한 에너지를 느끼곤 했다. 그가 사용한던 색상의 강렬함과 거친 붓터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어쩌면 살고자 하는 강한 생명력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 ─ 이 영화 역시 하나의 가정이자 픽션에 불과하겠지만 ─ 를 보면서 더욱더 고흐라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사이의 미묘한 불균형을 느꼈다. 




 인간적인 고흐는, 동생이 아니면 살아갈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가슴속에선 늘 공포와 불안과 싸우고 있고, 사람속에 속하고 싶지만 사람들에게 속하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지만 그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그러니 친구인 고갱이 떠날때 그토록 정신이 나가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 늘 강렬했다. 불안하고 불쾌하고 불온할지라도,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고흐의 애정이었을까, 세상에 대한 애정이었을까, 혹은 그의 그림을 봐 줄 사람들 ─ 설령, 그가 속하지 못할지라도 ─에 대한 짝사랑과 같은 애정이었을까.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오베르에서 의사 폴에게 했던 말처럼, 그는 예술을 위해 아픔조차 감수 했던 것은 아닐까. 때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병이 낫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하는 그 열정의 원천은 무엇일까. 대자연 속에서 자신은 '영원'을 본다던 '그것'을, 그는 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설령 이 세상은 그를 배척할지라도.






신이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절 화가로 만든것 같아요.








 어쩌면 그는 자기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예술적 혼이 자신을 미치게 할지라도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각오를 가진 예술가.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외로움에 떨면서, 생의 마지막까지조차 그의 뜻과는 관계없은 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 불운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화가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그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불안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영화의 초입의 장면이 다시 되풀이 된다. 다만 다시 나타난 그 장면은, 대사와 상황은 동일하지만 영화의 스크린의 절반이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런 장면은 이 영화 곳곳에서 연출되는데, 특히 중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많이 사용된다. 아마 이 영화는 그러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를 고흐의 불안정한 감정 속으로 이입시킴으로써, 고흐의 눈에만 보였던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렇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불쾌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 멀미할것 같은 영화다. 하지만 그것이 고흐의 세상이라면, 한번쯤 용기를 가지고 들여다봄직 할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영화라든가, 아주 연출이 마음에 들고 구성이 짜임새 있다든가, 교훈적이라든가, 그런 유의 감상평은 접어두겠다. 이 영화를 그렇게 접근하라고 만들어놓은 영화가 아닌것만 같아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앞으로 보러갈 사람이 있다면, 그런 기대보다는 화가이자 한 나약한 인간인 고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 싶다면  111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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