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에 어떤 인용구에 감명을 받아 펭귄클래식판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구입했었다. 읽지 않고 버려 두었다가, 책모임에서 이번 달 읽을 책을 선정해야 할 때 전자책 리스트 가장 아래에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고약한 기분 상태에서 읽으니 푹 빠져들 것만 같은 첫 장이었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내 생각엔 간이 안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난 내 병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하며 내가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의학과 의사들을 대단히 존경하긴 하지만,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다. 게다가 난 상당히 미신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의학을 존경하는 정도로만 믿는다.(난 미신을 믿지 않을 정도로 교육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미신을 믿는다.) 아니다. 사실 난 악의 때문에 치료받고 싶지 않다.’ 이렇게 어딘가 뒤틀리고 복잡한 사람의 이야기라면 감정 이입해 잘 읽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고, 길이도 짧았다.
기대와 달리 책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기분이 달라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고 이야기 자체가 난해했다. 결국 펭귄클래식판으로 대강 두 번을 읽고서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서 민음사판을 다시 구매했다. 펭귄클래식판 표현이 더 간명하여 마음에 남는 면이 있었지만, 민음사판이 전반적인 이해에는 더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 책을 선택했나 후회했지만, 세 번째 읽으니 제법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즐길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웃기지 않은가.
P175(이하 민음사 전자책 페이지)
그렇게 알랑방귀를 뀐 건 무슨 잇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자연의 총애를 입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우리 사이에서 즈베르코프는 기민함과 세련된 행동거지에 있어 전문가로 간주됐다. 바로 이 점에 나는 특히나 광분했다. 자신에 대한 회의란 조금도 없는 저 새된 목소리가 증오스러웠고, 대담하게 입을 놀리지만 엄청나게 바보 같은 소리만 지껄여대는 주제에 자기가 무슨 대단한 유머 감각이라도 갖춘 양 뻐기는 꼬락서니가 또 증오스러웠던 것이다. 잘생겼지만 멍청한 그의 얼굴(그래도 나는 이 얼굴을 나 자신의 똑똑한 얼굴과 기꺼이 맞바꿨을 것이다.)도, 40년대 풍의 방만한 장교식 태도도 증오스러웠다. 나는 또, 그가 여자 문제에 관한 한 자기는 앞으로도 늘 승승장구할 것이고 이 때문에 시시각각 결투를 할 거라고 말하는 것이 증오스러웠다.
p.215
내일은 결투라도 신청할 거다. 비열한 놈들 같으니. 설마 내가 7루블을 아까워할쏘냐. 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테지…… 젠장! 7루블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 지금 당장 나간다……!
물론 그러고서도 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자와 관련된 부분들은 좀 감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자를 깊이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 리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p.306
가엾은 그녀는 이 대학생의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기 같은 여자도 이렇게 떳떳하고 진실한 사랑을 받고 또 자기와도 이렇게 정중한 대화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내가 떠나기 전에 꼭 알려주고 싶었기에 이 유일한 보물을 가지러 달려갔던 것이다. 분명히 이 편지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보석함 속에 놓여 있을 운명이었으리라.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확신하건대, 그녀는 이걸 한평생 보물로, 자긍심과 자기변명의 보루로 간직할 것이다. 지금도, 이런 순간에도 자기 쪽에서 먼저 이 편지 생각이 나서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던가. 내 앞에서 순진하게 자랑도 좀 해 보고 내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회복하고 또 나한테 보여 줘서 칭찬도 받으려고 말이다.
p. 358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나한테서 모욕당하고 짓뭉개진 리자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얘기를 듣고서, 진심으로 누굴 사랑하는 여자가 늘 제일 먼저 이해하게 될 그것을 이해했다. 바로, 나야말로 불행한 인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p.366
그러니까 정작 난 그녀가 나를 찾아온 목적이 결코 동정 어린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통 깨닫지 못한 것이니, 실상 여자에게는 바로 이 사랑 속에 부활, 그 종류를 막론하고 온갖 파멸로부터의 구원, 갱생이 모두 담겨 있으며,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론 나타날 수도 없잖은가.
나는 이 주인공이 인간의 ‘추잡한 진실’을 담고 있는 복잡한 캐릭터라고 느꼈다. 분명 현재 우리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류의 전형적 면모가 있으면서도 단순화하기 어렵다. 그는 머리가 좋지만, 외모나 직업과 벌이가 시원찮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별 매력이 없다.(얼마나 보편적인 캐릭터인가!)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증오하고 그들의 사랑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한다. 하지만 또한 사랑과 친교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모욕하고 굴욕을 당한다. 권력을 원하면서도 권력과 사랑을 원할 이유가 없다고 회의에 차 있고, 하인인 아폴론에게조차 권력이 없다. 리자를 이용하고 모욕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하고 구원하고 싶어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정리하자면 그는 진짜 인간으로, 내면은 갈등에 차 있고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비판했다는 체르니셰프스키가 내세운 인물과 이런 점에서 대조적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캐릭터 역시 모두 전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다. 즈베르코프, 리자, 아폴론 캐릭터는 생생하고 모두에게서 고유의 감정이 느껴진다.
인물의 복잡성은 인간을 단순화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의도적으로 만든 부분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세계와 인간을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 같았다. 이야기가 길지 않은데도 다양한 진실과 지혜를 담고 있는 것도 그렇다. 주인공이 의도적으로 리자에게 설교를 하는 부분조차 그렇게 작위적이기보다는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작가가 매우 똑똑한 사람 같이 느껴지고, 이 작품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강렬해진 의식’(혹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강화된 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감정도 강렬하게 경험하고 생각도 많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고 상상하게 된다.
짧은 기간 짧은 책을 세 번 읽었는데, 더 읽어도 좋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고전은 어렵지만 앞으로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고전을 읽고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달의 책 선정이라는 배수진을 치고서 얻은 결실이다.
독서 모임을 하고 난 뒤에, 이 주인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진실에 대면했고, 완전히 솔직하게 수기를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여년 전 감명 깊게 읽었던 그 인용구를 여기에 덧붙여야겠다.
p.111
누구든 사람은 오직 친구들이 아니면 아무한테나 털어놓지 못하는 추억이 있는 법이다. 친구들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그것도 은밀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끝으로,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털어놓기 무서운 것들도 있는데, 점잖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