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얘기를 해도 되나요?”
이도연은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등은 지나치게 꼿꼿했고, 손끝은 무릎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종이가 없는데도 뭔가를 접었다 펴는 흉내. 보고서 작성 습관이 남은 듯한 몸짓. 그의 몸은 습관적으로 굳어 있었고, 그 경직된 자세는 그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상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종일관 불안해 보였다. 마실 물도 받지 않았고, 시선은 바닥이나 허공을 맴돌 뿐 윤서령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다.
윤서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펜을 기록지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허락인지, 아니면 그저 무관심한 리듬인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 침묵은 도연의 불안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도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에 잔잔히 번졌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당겨진 듯한 고요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매번 그래요. 장소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문 앞. 꿈인데… 상담소랑 똑같은 그 문입니다.”
서령의 펜촉이 종이를 강하게 눌러 작은 홈을 냈다.
펜 끝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미세한 마찰음이 그녀의 긴장을 대신 말해주었다.
“틈이 아주 얇아요. 그런데… 그 사이로 눈들이 보입니다. 여러 개가 동시에. 높이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깜빡임도 다릅니다. 하지만…”
도연은 손으로 턱을 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전부 같은 방향을 봅니다. 처음엔 저를 보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혹은 믿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서령은 멈췄던 펜촉을 다시 움직였다. 잉크가 얇게 번져 희미한 선을 남겼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지만, 손끝의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잠겨 있던 무거운 문을 여는 것처럼.
“첫 번째 꿈에선 소리가 없었습니다. 눈만 있었죠. 그런데 두 번째부터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령은 무의식적으로 기록지에 적었다.
— 말한다.
“그 목소리는… 제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문틈에서 제가 들었던 말들을 따라 합니다. 회사 동료가 했던 말, 어머니가 했던 말. 그리고…”
도연은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낯선 말도 있었습니다.”
서령의 펜촉이 세워졌다. 묻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 그녀를 대신해 흘러나왔다.
“오늘은… 어떤 말을 빌려왔습니까.”
도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뗐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닫혔군요.’”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분명히… 선생님 목소리였습니다.”
서령의 눈썹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이었으나, 펜촉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한 번 더 강하게 눌렀다. 종이에 길고 얇은 흠집이 남았다. 마치 날카로운 칼자국처럼.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어떤 상처가 긁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연은 시선을 기록지로 떨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규칙적입니다. 밤 열두 시. 정확히 자정이 되면 꿈은 시작됩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그다음엔 이틀에 한 번… 지금은 매일입니다.”
그의 손목이 시계를 찾듯 움직였다. 습관처럼, 강박처럼.
그는 접힌 메모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종이는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여기 적어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보고서를 낭독하는 톤으로 건조했다.
00:01, 눈 깜빡임 —
00:02, 목소리 —
00:03, 침묵 —
00:04, 또 눈 깜빡임 —
00:05, “괜찮아” (동료의 말) —
00:06, 침묵 —
00:07, “닫—” (불분명)
단순한 나열. 그러나 그 반복의 리듬이 방 안 공기를 더 무겁게 눌렀다.
마치 소음 대신 기계음이 들리는 것처럼.
메모 하단에는 작은 원들이 겹쳐 있었다. 습관처럼 그린 낙서였지만, 마치 크고 작은 눈동자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듯 기괴한 형상이었다. 도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꿈은… 점점 더 또렷해집니다. 그리고… 선생님 목소리로 ‘닫혔군요’라고 했습니다.”
서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펜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만 들어갔다. 종이 위에는 검은 점 하나가 깊게 박혔다. 잉크가 종이 섬유 속으로 스며들며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얼룩 하나가 더해진 것 같았다.
상담이 끝나고, 방은 고요해졌다. 주전자도, 바람도 멎은 듯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침묵 속에서 서령은 홀로 기록지를 펼쳤다. 마지막 장.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한 줄에서 멈췄다.
이선우.
글씨는 오래된 잉크였지만, 막 적은 듯 선명했다. 잉크는 번져 작은 눈동자 무늬처럼 퍼져 있었다.
서령은 기록지를 덮었다. 그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닫혀 있다는 건 언제나— 열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서령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려는 듯 했으나, 멈췄다.
그녀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열어서는 안 되었다. 그 문을 열면 봉인된 과거가 쏟아져 나와 그녀의 삶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잊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톡. 톡. 빗방울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리듬이, 문지방 아래서 들리던 '톡... 톡...' 소리와 이상하게 겹쳐졌다.
"왜 문을 닫았어요?"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기록지 위에는, 잉크가 번져 만든 또 하나의 점만이 남아 있었다.

독자의 몰입감을 위해 3화까지는 매일 공개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