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방학이 뭐라고:
미국 해변에서 겪은 언어 오해 사건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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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의 나는 봄방학(Spring Break)이라는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국의 '중간고사 후 짧은 휴일' 정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대학생들의 들뜬 눈빛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봄방학이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수업 시간 뒷자리에서는 누가 운전하고, 누가 숙소를 잡고, 누가 얼음통을 챙길지 같은 대화들이 오갔다. 요즘 같았으면 다들 스마트폰으로 에어비앤비를 비교했겠지만, 당시 우리는 다 같이 컴퓨터실에 앉아 모뎀 인터넷으로 모텔 가격을 검색하거나, 종이에 프린트한 호텔 리스트를 들고 다니며 회의했다. 예약은 물론 영어로 직접 전화해야 했고, 지도는 MapQuest에서 미리 경로를 뽑아 프린트해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날로그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다.(사실 가끔 그때의 감성이 그립다)


우리가 선택한 여행지는 플로리다의 Daytona Beach였다. 나는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하리라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데이토나 비치에 도착한 순간 산산조각 났다. 그곳은 지도가 예측하지 못한 세계였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래사장을 가득 메웠고, 힙합 음악이 파도 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누군가는 비어퐁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물총을 들고 춤추고 있었다. 여긴 방학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축제였다.


첫날 밤, 우리는 근처 저렴한 모텔에 짐을 풀고 작은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핫도그, 감자칩, 캔맥주 몇 개, 그리고 붉게 물든 하늘. 모든 게 낯설었고, 또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 친구들뿐만 아니라, 미국 친구들도 섞여 있어서 대화는 거의 영어였다. 말이 어눌하긴 해도 다들 웃으며 들어줬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밤이 되자 플로리다의 공기는 의외로 쌀쌀했다. 바닷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그때 따뜻한 음료 한 잔이 간절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녹여줄 무언가. 그래서 나는 그때껏 배운 모든 영어를 동원해 꽤 당당하게 말했다.


"Hey guys, let’s go drinking!" (얘들아 뭐 한 잔 마시러가자!)-->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 말을 한 순간, 주변이 약간 조용해졌다. 누군가 피식 웃었고, 다른 친구는 내 눈을 빤히 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Whoa, she’s going hard tonight!” (와, 쟤 오늘 밤에달리려고 하네)


나는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I mean… like, coffee? Or hot chocolate?”(내 말은...커피나...코코아?)


그러자 친구들은 우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Ohhh! You meant get a drink. Not go drinking. That’s totally different.”(오!니 말은 뭐 한 잔 마시자는 거구나 그거 완전히 다른거야!)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Let’s go drinking'은 단순히 마시자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곧 "술 마시러 가자, 바 호핑 하자, 오늘 밤 달리자!"라는 뜻이었다. 내가 원한 건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었는데, 내가 던진 문장은 파티의 서막을 알리는 총성과 같았다.


그날 이후로도 친구들은 나를 놀렸다. "Still drinking?" "Hot chocolate party again?" (여전히 달릴거야?)(코코아파티 해볼까?) 같은 농담이 오갔고, 나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처음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실수가 오히려 나를 영어에 더 가까워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 당시 유학 생활은 매일이 작고 큰 오해들의 연속이었다. 문법은 맞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고, 단어는 알겠는데 상대 반응이 묘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Daytona의 그 밤, 그리고 내가 자랑스럽게 외쳤던 그 한마디였다.


“Let’s go drinking.” 달려보자!


나는 이제 누군가 서툰 영어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웃으며 말해준다. 괜찮다고, 모든 오해와 실수가 곧 우리가 진짜 영어를 배우는 순간이었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내 마음속엔 여전히 뜨거운 코코아를 원했지만 'Let's go drinking!'을 외치던 스무 살의 내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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