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le: soft 발언과 인류애 착각

by 재미나이


내가 혼자 썸타고 좋아하던 Kyle...인류의 공공재..jpg


데이토나 비치에서의 봄방학. 그곳은 그저 해변이 아니라, 낯선 세계와 새로운 감정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Kyle. 백인과 남미 혼혈, 키는 훤칠하고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으며, 마치 잡지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하지만 외모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온기였다. 말투는 다정했고,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으며, 사람을 대할 때 늘 눈을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응시가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뭘 떨어뜨리면 먼저 달려가 주워주고, 대화 중엔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바비큐 파티에서 내가 음료를 들고 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You okay?” 하고 물으며 컵을 채워주던 사람이었다. 그 말투며 눈빛, 손동작 하나하나가 나에겐 낯설고도 특별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떠올리면, Kyle은 확실히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국 캠퍼스에선 선배가 라면 끓이면서 “물 더 있어?”라고 묻던 기억이 전부였다. 누가 문을 열어주거나, “괜찮아?”라고 눈 마주치며 말해주는 일 따윈 없었다. 그런 내게 Kyle의 존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친구에게 감탄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He's soft."(그는 너무 부드러워...)


그 말에 친구는 약간 멈칫하더니,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Ah... okay. I mean... yeah, he's… nice."(아... 맞아... 내 말은.... 카일이 괜찮은 애지...)

나는 그 반응이 왜 그리 미적지근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진심이었다. 그때 내게 'soft'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형용사였다. '부드럽고', '매너 좋고', '섬세한' 그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음 날, Kyle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딱딱했고, 눈빛은 평소보다 덜 따뜻했다.

“Did you say I’m... soft?”(너 내가 바보 같다고 했어?)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Yeah! You're really soft!”(응! 너 진짜 부드러워!)--->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Wait. Do you mean like... I’m weak? Or slow? Like... not smart?”(잠깐, 네 말은 내가 약하고 멍청하다는 거잖아?)

그 순간, 나는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soft'는 영어에서 사람에게 쓸 경우, ‘부드럽다’ 외에도 ‘멍청하다’, ‘약하다’, ‘우유부단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No no! I meant like... gentle! Kind! Sweet! Like... soft lighting! Soft pillow! GOOD soft!!”

(아냐! 나는... 그러니까.... 매너 좋고! 다정하다고!.... 마치.... 은은한 조명처럼! 부드러운 베개! 좋은 부드러운 거!)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Okay. You meant soft like nice. That’s actually kinda cute.” (좋아. 너는 좋다는 의미구나. 그러니까 멋지다는 말 뭐 그런거지)

위기는 그렇게 넘겼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형용사든 입 밖으로 꺼내기 전, 머릿속에서 세 번쯤 굴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Kyle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정하다고 믿었다. 말을 걸어올 때도, 웃어줄 때도, 컵을 채워줄 때도—모든 게 ‘나에게만’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하나둘씩 보게 됐다.

그는 모두에게 컵을 따라주고, 모두에게 “You okay?”라고 물었으며, 모두에게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었다. 그의 인류애는 넘치다 못해 터져 나오고 있었고, 나는 그 거대한 물결에 살짝 튀긴 물방울 한 방울이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약간은 실망스러웠지만, 곧 웃음이 났다. “하긴, 그 정도 외모와 매너면… 공유 재여야지.” 그는 나에게 친절했던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친절이었고, 나는 그날 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착각하고 있던 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모두에게 ‘나이스’했고, 나는 그 평범한 친절에 혼자 설렜던 거다.

그 후로 누군가 썸 타는 착각을 했다고 하면 나는 웃으며 말한다.

“나도 데이토나에서 잘생긴 남자한테 ‘너 진짜 soft 하다’고 했다가, 혼자 썸인 줄 알고 착각하다가, 머쓱하게 깨진 적 있어. 근데 덕분에 영어도, 감정도, 그리고 인류애도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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