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도 충전, 스마트 워치도 충전, 노트북도 충전…이정도면 요즘 사람들은 충전의 노예라는 것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 마당에 자동차까지 플러그를 꽂으며 탄다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이번 XC90 리차지 시승을 한 뒤 충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이건 스트레스가 아니라 해피니스다.
볼보는 현재 친환경 파워트레인으로만 모든 라인업을 운영한다. 순수 전기차(BEV), 2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에 48볼트 모터와 배터리를 더한 마일드 하이브리드(MHEV), 같은 엔진에 충전이 가능한 18.8kWh 배터리와 모터를 더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PHEV 파워트레인은 XC60, S90, XC90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XC90 B6에 이어 경험한 XC90 T8은 눈으로 봐선 큰 차이가 없지만 주행을 시작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선사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순수 전기 주행 영역과 서스펜션이다. 대용량 배터리를 가진 덕에 이 차는 거의 전기차처럼 움직인다. 용량이 작은 배터리를 가진 하이브리드 방식 자동차는 골목길이나 주차장처럼 서행할 때만 전기로 주행을 한다. 심지어 조금만 가속페달에 힘을 주면 곧바로 ‘왜앵’하고 엔진이 깨어나기 마련. 하지만 XC90 T8은 도심은 물론, 시속 140km까지도 순수전기로만 달릴 수 있다. 순수전기 주행거리도 공식 제원 기준 56km나 된다.
수치만 늘어놓아도 인상적이지만 ‘전기차’로 달릴 때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풀어보면 T8은 더욱 매력적이다. 먼저 다섯 가지나 되는 드라이브 모드(하이브리드, 파워, 퓨어, 오프로드, 상시 4륜)는 동력기관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파워모드에선 엔진과 모터 배터리가 모든 것을 쏟아내며 455마력을 네 바퀴에 전하는데 이 차가 2.4톤에 달하는 게 맞나 싶을 만큼 빠르다. 제로백 5.3초가 몸으로는 더 빠르게 느껴진다. 기본값은 하이브리드 모드인데, 모터 배터리로 주행하다가 엔진이 깨어날 때 위화감이 전혀 없고 모든 게 자연스럽다. 배터리만 구동하는 퓨어 모드에서도 답답함은 없다. 모터만으로 낼 수 있는 출력과 최대토크도 상당한 까닭이다.
공식 제원 기준 1회 충전 시 56km를 주행할 수 있는 배터리는 충방전이 수시로 이뤄진다. 트립 컴퓨터의 복합연비도 27km/L를 쉽게 웃돌았는데, 연료탱크가 71L인 걸 감안할 때 한 번 주유를 하면 900km 주행은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이다. 배터리 전력을 다 소모하면 계기판상 배터리 양은 0%라고 뜨지만 실제로 100% 방전은 되지 않는다.
XC90 T8의 주행이 더없이 쾌적한 것은 전륜과 후륜에 들어간 에어 서스펜션 덕도 크다. 높게 앉은 대형 SUV지만 노면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충격과 진동은 웬만해선 느낄 수 없다. 앞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놀라운 건 2열, 3열 승차감이다. 패밀리 SUV로 주로 사용하는 차인만큼 동승자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데, XC90 T8은 룸미러로 뒷자리 승객 표정을 살필 필요가 없다.
그러고보니 XC90 T8은 운전의 재미도 꽤 좋다. 차의 움직임이 날쌔고 제어하기 쉽다. 에어서스펜션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건 3열이다. 뒷바퀴 바로 위에 걸터앉은 듯한 구조임에도 마치 방석이라도 깔고 앉은 것처럼 푸근하다.
보통 PHEV를 타더라도 충전하며 타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XC90 T8은 달랐다. 전기로 차가 움직일 때 전해주는 고요함과 가벼움이 상당히 중독적이어서 집에 돌아오면 플러그부터 충전구에 꽂았다. 시승을 마칠 무렵 무려 400여 km를 주행했는데도 남은 주행거리가 600km 가까이 나왔다. 차를 충전할 생각에 마음이 이리도 가벼울 줄이야. XC90 B6보다 1,870만원 비싼 1억 1,520만원이란 가격에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글 ㅣ 이재림(스튜디오 카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