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무기력이랄까요? 회의주의에 빠지기 참 쉬운 때입니다. 아무래 애를 써도 나아지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원하는 건 얼추 이룬 것 같은데 어쩐지 의욕이 없는 것 같은 날도 참 쉽게 오죠. 선택지는 너무 많아졌습니다.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시대, 정보도 곳곳에서 쏟아져 내립니다. 무턱대고 휩쓸리다가는 아무것도 결정하기 어려운 지경이에요.
자동차를 고를 때의 마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V60 크로스 컨트리라는 이름을 봤을 때도 조금은 그런 심정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에 참 많은 물음표가 있었습니다. 이 장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걸까? 세단을 사고 싶으면 세단을 사고, SUV를 사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될 텐데. ‘크로스 컨트리’라는 세그먼트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걸까?
세단은 정통의 장르입니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외형, 지금까지의 행동양식에 가장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장르이기도 하죠. 볼보 S60은 역동적이면서도 세련된 이미지, 젊음과 품위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SUV는 지금 가장 뜨거운 장르입니다. 새 차를 갖고 싶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SUV를 염두에 두고 전시장을 찾습니다. 넉넉한 공간과 주말의 여유, 풍성한 감각과 안정성까지 고루 소유할 수 있는 장르. 같은 세그먼트라면 볼보 XC60이 있습니다. 시장 전체를 놓고 생각해봐도 강력한 모델이에요. 지금 SUV를 갖고 싶어 하는 거의 모든 분들께 아낌없이 추천할 수 있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V60 크로스 컨트리는 그 사이에 있을까요?
그렇다면 세단과 SUV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고 있을까요? 낯설어 보일 수 있는 이 비례에는 어떤 장점이 담겨 있을까요? 그래서, 결국, 그게 필요할까요?
경험해보기 전에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경험하고 나면 명쾌해지는 질문이기도 하죠.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차고를 벗어나는 순간.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접어들어 달리기 시작할 때 분명하고 시원하게 해소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S60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편이 편할 듯합니다. V60 크로스 컨트리는 SUV보다 세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으니까요. V60 크로스 컨트리의 전장은 S60보다 25밀리미터 깁니다. 전폭은 같지만 전고는 60밀리미터 높습니다. 세단보다 6센티미터나 높다니, 그럼 SUV 하고도 한 번 비교해볼까요? 전고는 XC60보다 155밀리미터나 낮습니다. 굉장히 큰 차이죠. 어디까지나 세단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전장은 75밀리미터 길고 전폭은 같습니다.
이제 V60 크로스 컨트리의 성격을 짐작해볼까요? SUV보다는 확실히 세단에 가까울 겁니다. 제원 수치가 말해주고 있어요. 하지만 세단보다 훨씬 넉넉한 공간감을 자랑하고 있기도 합니다. 트렁크를 부풀려 늘린 형태를 하고 있으니까요. 자세와 감각은 세단에 가깝지만 활용할 수 있는 공간감은 SUV에 가깝다는 데서 이 차의 정체성과 진가가 같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세단의 보수적인 매력과 품위를 그대로 지키면서 SUV의 효용까지 누리고 싶은 마음. 일상과 일탈을 같이 누릴 수 있는 단정한 선택으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누군가에겐 익숙하지 않은 형태일 수 있지만 그래서 특별합니다. 세단과 SUV 사이에서 황금 비율을 찾아 그린 옆모습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한가운데서,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존재하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패기까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기준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입 모아 말하고 싶어 하는 그 단어, 바로 ‘럭셔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넉넉한 공간은 럭셔리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실내에 머무를 때의 공간감을 생각하면 장르를 불문하고 무조건 큰 차를 선택하면 해결되겠죠. 세단의 형태에서 트렁크를 늘린 크로스 컨트리를 생각했을 땐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주 공간의 정통과 품위는 그대로인데 충분히 높아지고 넉넉해진 트렁크 공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반려견을 위한 공간을 꾸며주면 어떨까요? 충분해 보입니다. 가까운 교외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주말, 반려견 혼자 마당에 둘 수는 없으니까요. 오랜만에 친구와 같이 떠나는 캠핑을 위한 짐들을 실어볼까요? 마침 새로 장만한 텐트와 의자, 취사도구와 음식까지 알차게 담을 수 있을 겁니다. 뭐, 셋이나 넷이라도 좋겠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떠나는 여행도 살갑고 좋겠네요.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는 주말은 어떨까요? 다가오는 여름에는 뒷좌석을 접은 공간에 서핑보드를 실어봐도 좋겠습니다. 서핑을 위해 차를 고르는 경우도 있지만, 서핑 보드를 실을 공간이 충분한 차를 갖게 됐으니 괜스레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음을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여유가 있다면 도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새로움이란 그런 거니까요.
V60 크로스 컨트리의 공간은 그런 의미 같습니다. 길어진 공간, 세단보다 넉넉한 트렁크에는 일상이 아닌 것들, 기분을 좋게 하는 일들, 함께 하면 좋은 사람들을 위한 시간을 채우고 싶어 집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까 이젠 주말 이틀 정도는 한적한 곳에서 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월요일이 되면 트렁크에 실려 있던 짐은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날렵한 슈트를 꺼내 입습니다. 다시 일상이니까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승리해야 하니까요.
자동차란 늘 그런 오브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냉정하고 정확한 기계이면서, 소유하는 순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추억이 담기는 물건. 나와 당신, 우리가 같이 나눴던 시간들이 쌓이는 공간으로서의 자동차 말입니다. 그렇다면, 볼보 V60 크로스 컨트리의 저 팽팽한 아름다움과 넉넉한 공간이 좀 달리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한 일상과 넉넉한 일탈 사이, 날렵한 구두와 간편한 운동화 사이, 혼자만의 시간과 다 같이 나눈 추억 사이에 V60 크로스 컨트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장르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일상과 일탈 사이에서 든든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무기력할 이유도 회의주의에 빠질 여유도 없습니다. 두루두루 참 좋은 시간. 잘 만든 자동차가 약속하는 가치입니다.
글/ 정우성(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