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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Feb 25. 2019

좋아하는 일을 하든가, 잘하는 일을 좋아하든가

노포 장인이 알려주는 정곡을 찌르는 맛

불과 얼마 전부터 노포를 좋아하게 되었다. 허름한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 칠이 다 벗겨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으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게 티가 나는 음식들을 성의 없이 탁탁 내어놓는 모습이 어쩐지 더 멋있어 보이는 가게들.

메뉴판을 한참 쳐다보고 있노라면 옆에 다가와 ‘뭘 고민하고 그래, 다 맛있는데’ 하는 얼굴로 “뭐 드릴까?”라고 묻는 노포의 장인들. 맛에 대한 믿음을 ‘무심한 태도’로 대신하는 노포 장인에게서 배우는 건 딱 하나다. 잘하는 것을 오래 할 것.




잘하는 것을 오래 할 것.

잦은 포기와 실패를 반복하는 내게 이 말이 가진 뜻은 좀 특별하다. 고등학교에서 이과 혹은 문과를 결정해야 했을 때, 대학에 들어가기 전 전공을 정해야 했을 때, 취업 준비를 해야 했을 때, 건망증 심한 팀장의 실수를 뒤집어써서 퇴사를 고민했을 때, 심지어 지금까지도 나를 자주 시험에 빠뜨리게 하는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 잘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

일생일대에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유난을 떨며 몇날며칠 끙끙 앓게 만드는 질문. 인류 종말을 예고하면서 악당이 준비한 폭탄 앞에서 빨간 선을 끊느냐 파란 선을 끊느냐 고민하느라 진땀 빼는 영화 주인공처럼 그 질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조해졌다. 잘못 선택하면 펑! 폭탄 터지듯 큰일이 날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노포 장인들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우린 액션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선택을 잘못 한다고 해서 폭탄을 터뜨릴 악당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2년 전쯤 서울 곳곳의 매력적인 골목과 노포들을 꿰뚫고 있는 김선배가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뒤쪽 구석진 길 끝에 있는 김밥집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 앉을 자리가 두세 테이블밖에 없을 정도로 아주 협소해서 일행이 아니라도 합석을 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김밥계의 스티브 잡스를 영접하고야 말았다.


종로의 얽히고설켜 있는 골목을 걷고 또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김귀엽 할머니가 이름과는 달리 아주 시크하게 고추김밥을 툭툭 썰어 내어 주시는 분식집이 있다. 오후 3시부터 떡볶이 딱 한 판만 만들어 40인분만 팔고 미련 없이 문을 닫는 곳. 떡볶이 마니아들에겐 입소문이 자자한 곳.


김귀엽 할머니가 만드는 고추김밥의 매운 맛은 수준이 다르다. 그동안 먹어 왔던 매운 라면, 매운 돈가스, 매운 치킨이 그냥 커피면 김귀엽 할머니의 고추김밥은 티오피. 오뎅국물은 그저 거들 뿐이다.


할머니의 매운 맛은 잠깐 훅 치고 들어왔다가 훅 빠진다. 심플하다.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매일 밤 불닭볶음면을 먹고 난 뒤 위장을 부여잡고 밤새 뒹굴다가 다음날 꼭 화장실에서 피를 보던 나의 지난날들이 무색해지는 맵고도 간결한 맛이여.

역시 분식의 애플, 김밥계의 스티브 잡스는 혁신 그 자체. 나는 고추김밥을 먹으며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더랬다.


협소한 테이블 앞에 앉아 고추김밥을 돌돌돌 말아 칼로 툭툭 자르는 할머니의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맛에 있어 타협은 절대 없으리’라는 단단한 마음새가 엿보인다. 오후 3시에 떡볶이를 한 판 만들어서 다 팔면 깔끔하게 문을 닫는 한결같은 심지까지. (할머니! 떡볶이도 김밥도 더 만들어 주세요 제발요.)




그러고 보면 노포 장인들의 내공이 쌓인 음식들이 하나같이 공통점으로 갖고 있는 것은 대개 '간결한 맛'이 아닐까?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비결은 아무리 생각해도 힘주기가 아닌 힘 빼기의 영역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역시. 잘하는 것을 오래 하는 데에는 화려한 기술이나 편법 같은 건 필요 없다. 오로지 ‘힘을 줘야 하는 부분에선 힘을 주고, 힘을 빼야 하는 부분에선 힘을 뺀다’일 뿐. 간결하지만 깊은 맛을 내는 확실한 방법은 힘을 줬다가 빼는 순간 즉, 치고 빠지는 타이밍의 맛에 있다.


TV 인터뷰에서 “내가 실컷 쉬고 나면 손님한테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지. 내 몸이 편하면 아무래도 신경 써서 해 주니까. 내 몸이 피곤하면 아무리 한다고 해도 정성스럽게 못 해요”라고 김귀엽 할머니가 말했다. 가게를 운영할 때도 쉬어야 할 땐 쉬고 일해야 할 땐 일한다. 과연, 치고 빠지기의 영역인 것이다.




내 인생에도 치고 빠지는 타이밍의 맛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지 잘하는 일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낼모레 90세를 앞둔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늘 같다.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쓰지 않겄냐잉. 사람 죽으란 법 없고, 계속하다 보면 어떻게든 살 길이 나타나는 법이제. 다 자기가 하는 만큼 자기 팔자 타고난당께.”


그러면서 지갑은 크게 열수록 그만큼 돈이 들어오니, 이번에는 이 늙고 힘없는 할멈에게 지갑 한 번 크게 열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까지 덧붙이신다. 용돈 달라는 말을 이토록 민망하지 않고도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잡아 말할 줄 아는 할머니. (어느새 지갑을 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손주의 신뢰와 용돈을 동시에 얻어가는 지혜로움의 왕.




김귀엽 할머니나 낼모레 90세를 앞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앞뒤 재지 말고 그저 가던 길이나 가는 것’이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다 보면 할머니들 말처럼 새로운 길이 나타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일이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올 수도 있고(좋아하던 일이 싫어지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잘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잘하던 일이 좋아지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든 잘하는 일이든 우직하게 가다 보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꼼수 부리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힘을 줘야 할 땐 힘을 주고, 힘을 빼야 할 땐 힘을 빼면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인생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고추김밥의 달인 할머니와 낼모레 90세인 할머니 말씀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 잘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든가, 잘하는 일을 좋아하든가 둘 중 하나인 게 속 편하고 좋습디다"라고 답해주고 싶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노포 장인들처럼 잘하는 것을 오래 하는 것보다(사실 잘하는 것도 없음...) 좋아하는 것들을 잡다하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아무래도 장인이 되긴 글러먹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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