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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Feb 10. 2019

퇴사하고 싶을 땐 템플 스테이를 합시다

달빛은 어느 길에나 쏟아지는 법

지난 금요일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는 개그우먼 박나래가 백양사에서 템플 스테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날 출연한 백양사 정관스님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he chef's table> 시즌 3에 참여해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분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정관스님

https://youtu.be/J0kmDQ0hYEo

The chef's table 시즌 3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요리사가 아니다”라며 본인은 수행자일 뿐이라고 말하던 정관스님은 사찰 음식의 대가로 외국의 여러 미디어에서 집중조명을 받은 바 있다. 사찰 근처의 자연으로부터 얻은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음식이 ‘로컬 푸드’라는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평소에도 요리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음식까지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박나래였기 때문에 방송에서는 공양간에서 사찰 음식을 요리하는 모습을 주로 보여 주었지만 나는 산속 깊은 곳에 머물렀던 작년 가을이 떠올랐다.




작년 가을 때늦은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간 어느 주말, 나는 템플 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종로3가 탑골공원 근처 정류장에서 7212번 버스를 타고 대략 한 시간 정도 가면 도착하는 곳. 종로구 구기동 삼각산 깊은 자락에 위치한 곳. 바로 금선사였다.


당시 나는 밤양갱 같았다.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운 것도 아닌 상태. 회사에서는 갖은 야근과 마감으로 낯빛은 늘 잿빛이었고 회의 때마다 새로운 기획 아이템 하나 내놓지 못해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때. 주말에는 스트레스로 흐물흐물해진 몸을 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잤다. (무기력증을 유발하고 열정은 앗아가는 야근은 이렇게 위악한 것입니다...) 그때 선배가 나에게 제안 하나를 했다.


“템플 스테이 갈래?”    

  

예쓰, 예쓰, 무조건 예쓰.

전부터 나는 여행과 템플 스테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거야’와 같은 환상을 품고 갔다 온 여행이 대체 몇 번인가. 여행은 ‘지금과는 다른 나’를 발견하기는커녕 ‘이토록 변함없이 찌질한 나’를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하는 계기일 뿐이었다. 템플 스테이는 좀 다를 거야, 같은 생각을 하며 짐을 쌌다.




태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계곡물이 삼각산 깊은 곳 금선사 주위를 둘러싼 채 콸콸 흘러넘쳤다. 어찌나 조용한지 들리는 소리라곤 계곡물 소리, 산새 소리, 마당을 쓰는 빗질소리뿐이었다. 절복과 고무신을 받은 뒤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니 벌써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은 템플 스테이 다른 참가자 두 명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조용히 인사하고 가볍게 통성명을 한 다음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서울 시내 전경이 전부 다 내려다보이는 창밖 풍경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자연을 바라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금선사


백양사에 정관스님이 있다면 금선사에는 선우스님이 있다. 까칠하면서도 유쾌한 선우스님과 함께 다른 참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자기소개를 나눴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장 많이 나온 고민은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와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어 퇴사하고 이곳에 왔다’였다. 다들 눈시울이 빨개지고 울먹거렸다.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 더 버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퇴사했다.”

마치 버티지 못한 것이 죄인양, 오롯이 자신의 탓인양, 인생의 패배자인양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과 스님과 대화를 나누며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우리에게는 다음이 있다. 직장생활에도 늘 입사와 퇴사 같은 ‘다음’들이 있고, 관계에도 만남과 헤어짐 같은 ‘다음’들이 있다. 이런 수많은 다음들이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다음들에 쫄지 말고 나다움으로 맞받아치는 것이다.

버티는 것이 약일 수도 독일 수도 있다는 것. 버틸 수 없으면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버틸 수 있으면 악착같이 버티는 것."


아주 평범한 깨달음이었지만. 나는 대단한 진리를 깨우친 것마냥 마음이 가벼워져 발우공양 할 때도 그릇을 싹싹 비워 잔반 없이 깨끗하게 식사를 마무리했고, 108배 할 때는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반복해서 되뇌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는 깊고 고요한 밤을 가로지르는 타종소리에 잠이 저절로 깼다. 평소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시간대였는데 몸이 먼저 반응해 일어났다. 그리고 삼각산 높은 곳에 있는 너른 바위까지 올라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명상까지. 완벽한 템플 스테이였다.

명상 후 @sootn




템플 스테이 첫째날 밤에 간단한 다과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 선배랑 잠깐 들렀다.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도 뒤따라 들어와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때마침 서울불꽃축제 기간이라 저 멀리 보이는 여의도 근처에서 커다란 불꽃이 팡팡 튀었다. 빨갛고 파란 불꽃쇼에 몇몇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고 몇몇 사람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불꽃쇼도 끝이 나고 어느 새 조용해진 산사. 주변을 밝히는 도시의 흔한 가로등 없이 주변은 깜깜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왠일인지 눈앞은 훤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둥근 달이 노오랗게 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금선사에서 볼 수 있는 서울 야경 @sootn


머리 위의 커다란 달을 보며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달빛은 어느 길에나 쏟아진다. 어느 곳 하나 차별하는 법 없이 구석구석 밝힌다. 다만 당장 바로 눈앞에 놓인 일들 때문에 우리의 눈이 조금 어두워져 있을 뿐 사실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의 방향은 늘 빛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땐 주변의 잡음 스위치를 모두 off해보면 어떨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은 길이 내 앞에 선명히 놓여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건 아마도 템플 스테이를 해야 하는 이유. 첫날 울먹이며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더니 둘째날 한층 밝아진 낯빛으로 청년들이 산을 내려가는 이유. 내가 템플 스테이를 강력추천하는 이유.


때늦은 태풍이 휩쓸고 간 어느 가을날

스트레스로 살짝 맛이 가서 흐물거리는 밤양갱이, 밤색 빛깔로 윤기가 흐르는 달디 단 밤양갱이 되어서 돌아왔다.


* 여전히 마감 때가 돌아오면 예민력이 폭발하지만 아직까진 달빛에 긍정력이 충전되고 있다. 회사도 잘 다니고 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 다시 마감 시즌인데 말이지요. 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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