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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Sep 06. 2020

가늘고 길게 버티는 마음

3화.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은 무서우니까

나에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기준은 브래지어를 입었다 벗는 일에 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소화불량이란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체했다 싶을 땐 까스활명수를 마실 것도 없이 버거킹 와퍼 같은 것을 위장 속에 꾸역꾸역 밀어넣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왕성한 식욕과 제 역할에 충실한 소화기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덩치뿐만 아니라 혈색도 항시 좋았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뭐만 먹었다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명치가 아팠다. 체기가 너무 심해 명치끝이 아프고 허리도 못 펴는 지경이 되면 극약 처방을 내린다. 바로 노브라. 노브라는 만병통치약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가 잘 썩는 탓에 치과에도 자주 간다. 지금은 단골이 된 치과에 가서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 또 충치가 있나요?" "아니요, 웬일인지 이번엔 이들이 멀쩡하네요." "그런데 왜 이 사이에 이물질이 자주 끼는 거죠?" "이가 벌어졌으니까 그렇죠." "네? 이가 벌어져요? 갑자기 왜 벌어지는 건데요?" 한껏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의사 선생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말했다.


왜긴 왜겠어요. 노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죠.


명쾌하다. 그렇다. 나도 노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이에 음식이 자꾸만 끼는 것도, 하루가 멀다 하고 체하는 것도 다 내가 늙고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 들러 치실을 사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 잠옷을 대충 걸쳤다.


이와 이 사이는 천천히 벌어지고 가슴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차츰차츰 처진다. 엄마는 늘 자세를 강조했다.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어깨는 쫙 펴고 아랫배에 힘을 팍 줘야 사람의 중심이 똑바로 선다고 말했다.


중심이 똑바로 서면 쓸데없이 뱃살이 찌는 일도 없고 사람이 커 보인다. 네가 가진 능력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티가 날 거야. 닫힌 문 틈으로도 꼭 새어 나오는 빛처럼 아무리 막으려 해도 티가 나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여기서 너의 무게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준단다.


엄마는 검지로 배꼽 아래를 가리키며 "자, 여기에 힘 줘봐!"라고 힘주어 말했고, 나는 "핫!" 하고 기합을 주며 숨을 참았다. 똥배가 순간적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엄마는 그렇게 외할머니에게 배운 바른 자세의 중요성을 딸에게 가르쳐주었다. 외할머니 또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았을 테다. 실제로 나는 외할머니의 구부정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신의 딸들이 비정한 세상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한 소중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심신 단련과도 같았다. 배꼽 아래에 힘을 주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듯이 적당한 긴장을 매 순간 몸과 마음에 심었다.


서른이 넘은 나는 이제 아침저녁으로 브래지어 후크를 채웠다 풀면서 긴장을 채웠다 풀었다 반복한다. 나는 현대 여성의 페르소나는 브래지어라고 확신한다. 브래지어를 입음으로써 받은 월급만큼 일을 해내고, 벗음으로써 모든 사회적인 역할을 내려놓는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스트레스로 유지되는 이런 생활이 결코 나쁘지 않다.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보다 가늘고 길게 산다는 말을 좋아한다. 얼핏 하찮아 보이는 규칙들이 생활에 미치는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하루 한 끼 정도는 직접 요리해서 먹기, 딱 십 분만 일찍 출발해서 약속 장소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가지런히 갠 속옷들을 서랍장에 일렬로 정리하기, 자기 전에 들을 음악 한 곡을 고심해서 고르기처럼 적당히 부지런하고 적당히 게으르게 만들어가는 생활의 규칙이 차곡차곡 쌓인다. 한 방에 해결되는 인생 같은 건 무섭기도 하고, 그런 행운 같은 순간이 쉽사리 내게 오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다.


가늘고 길게 버티는 마음 아래에는 단단한 일상이 자리 잡고 있다. 몸과 마음이 축축 처져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고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물에 젖은 솜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터로 나가야 한다. 출근길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내 표정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어둡지만 회사에 도착해 동료들과 부대끼며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나로 돌아와 있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위안이다.


적당한 인생만큼 지루하고 따분한 삶은 없으리라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적당히 가늘고 긴 일상이야말로 큰 행운이다. 하루하루 반복하고 싶은 자신만의 규칙ㅇ르 만들어야 한다. 무겁고 크고 지키기 부담스러운 규칙 말고, 적정선의 노력만 기울이면 충분히 이뤄낼 만한 심플한 규칙들로 하루를 채우다 보면 인생의 고달픔 따위는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날이 밝았다. 수백 번 반복했고, 앞으로도 수없이 거듭할 출근 준비를 마친 끝에 제법 비장한 표정으로 지난밤 아무렇게나 벗어둔 브래지어를 입는다. 출근할 시간이다. 오늘도 가늘고 길게 버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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