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완벽한 몸뚱이를 보았나.
우리는 스페인 지방 도시를 여행 중 이었다.
태양이 말 그대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낮이었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어려웠다.
주변 지리에 어두운 관광객인 나와 4살 배기 아들은 덥고 지쳤다. 마침 그곳이 해안마을이어서, 나는 바다를 구경하고 아이는 잔잔한 파도와 놀게 할 참이었다.
놀 만한 해변가로 가려면 드넓게 깔린 모래를 걸은 후 경사로 내려가야 했다. 모래에 발을 푹푹 담그며 우리 둘은 한참을 걸었다.
이윽고 부서지는 파도가 보이는 모래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흠칫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래위에 뒹굴고 있었는데 모두 벌거벗고 있었다. 살색 바다사자들 같았다. 나는 집단 나체들의 군상들을 목욕탕에서 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매우 당황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어떤 노년의 남자의 몸뚱이를 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순간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누드비치였구나. 뭐 그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는 갈 일도 가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4살 아이와 이토록 갑자기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촌년이 그러듯, 촌티를 내지 말자, 놀란 티를 내면 무례한 거야.라는 생각을 그 와중에 했다. 그냥 휙 돌아서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돌아섰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래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살색 바다사자들 같은 몸뚱이들을 헤치고. 천지분간 못하는 아이가 마냥 파도가 좋다고 뛰어가는 동안 나는 머리를 굴렸다. 뒤에 앉으면 보기 싫어도 더 많이 봐야 하니까 최대한 바다 가까이 앉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게 온 등짝으로 느껴졌다.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이 모래사장은 암묵적으로 순결한 에덴동산이었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몸도 판단없이 받아들이기로 한 곳이다.
그런데 이 무대에 이미 선악과를 먹은 타락한 자가 속세의 옷을 입고 난입한 셈이었다. 오만하게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원죄를 품고서.
졸지에 타락한 불청객이 된 나는 속으로 외쳤다.
바다로 걸어갈 게 아니라 아까 돌아섰어야 했는데, 왜 난 이렇게 바보냔 말이야. 아니 이런 데 갑자기 누드비치가 있는 줄 알았나. 와. 진짜 다 내놓고 자유롭게 다니네. 그렇지만 영화처럼 섹시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다. 쭈글쭈글하고 뚱뚱하거나 쳐진 몸들. 살색 바다사자들 무리 한가운데 우뚝 앉은 외계인처럼 나는 도대체 누구이고 여긴 어디란 말인가. 평화로운 지중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실 비키니나 쫙 달라붙는 삼각수영복도 노출량을 따지면 벗은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손수건 만 한 헝겊이 있느냐 없느냐에 나는 이렇게도 당황하는구나.
내 생에 꼽을 정도로 1초 1초가 느리게 흘러갔다. 어느 타이밍에 일어나야 최대한 자연스러울까를 고민했지만 이미 내 존재자체가 튀었다. 외딴 시골마을이라 동양인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나는 혹시 애가 안 간다고 할까 봐 두려워하며 아들을 불렀다.
이제 가자.
그리고는 모래언덕을 파바박 올라 무대에서 급 퇴장했다.
인간의 몸은 몸일 뿐이다. 부끄러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지구에 사는 동물로서 저들처럼, 햇빛 아래 저토록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해 본 적이 있었나. 음… 신생아기 이후로 없었다.
걸친 옷의 수 만큼이나 내 머릿속 관념들이 겹겹이 느껴졌다. 어떤 몸은 예쁘고, 어떤 몸은 추하고, 탱탱한 피부는 탐스럽고 가죽만 남은 피부는 슬프다. 가슴과 음부는 은밀하고 부끄럽다. 가슴골이 보이면 야하고 헤퍼 보인다. 다리의 털이나 겨드랑이의 털은 없어야 한다. 종아리는 날씬해야 한다. 배는 납작해야 하고 팔뚝은 가늘어야 하고 무릎은 까매서는 안되고 머리카락은 윤기가 있어야 하며 목에는 주름이 없어야 예쁘고 엉덩이는 적당히 올라붙어야 하고….. 끝도 없다.
나도 자유롭고 당당하고 쿨해지고 싶다. 미치게 답답한데 이 관념의 옷은 벗기가 참 힘들다. 남보기 뭣한 몸은 대체로 가리고 사는 것이 미덕인 세계에 살다가 가끔 다채로운 체형과 자유로운 의복,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면 왠지 가벼운 마음이 되는데도. 그래서 신경 쓰지 말자, 내 안의 불필요한 가치판단을 버리자, 상업 광고 속 모델이나 연예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그게 어렵다.
미술대학 1학년 때 인물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다. 누드크로키도 하고, 유화도 그리는 시간이었다. 모델이 들어와 중앙에 놓인 흰 천이 깔린 정물대에 오른다.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빙 둘러 지켜보는 가운데 포즈를 정한다. 자세를 고정한 채 20분간 꼼짝하지 않는다. 이후에 10분가량 쉬고, 20분 포즈를 반복한다. 사전에 우리들은 모델을 대하는 기본 예의를 배웠다. 웃거나 농담하지 말 것, 최대한 조용하고 진지하게 대상을 대할 것. (야하거나 망측하다거나 웃기다거나 그런 생각 따위를 설마 하진 않겠지!) 오직 인체의 골격을 관찰하고 미학적, 학구적 시선으로만 대상을 대할 것.
물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저절로 대상을 대상으로써만 관찰하게 되고, 그 밖의 상념들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난처했던 어떤 날의 기억이 있다. 첫 누드수업이었는데, 또래의 젊은 남자 모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 하필 내가 실기실에 살짝 늦게 들어왔다. 앉고 보니 모델이 정확히 내 자리를 향해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좀 빨리 왔으면 덜 민망하고 더 아름다운 자세를 찾아 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자리만 비어있어서 모델이 일부러 그렇게 앉은 것 같았다. 남자친구를 사귄 경험이 전무하고 순진 그 자체였던 내가 성인 남자의 몸을 자세히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이 구도에서 저 물체 말고 무엇을 그려야 하나. 정말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3시간을 버텼다. 당황한 티는 내면 안돼! 필사적으로 얼굴근육을 통제했다. 그 기억이 스페인의 누드비치에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거다.
어쨌든 간에 신체란 참 신비하고 아름답다. 기능뿐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그렇다. 피부는 언뜻 보면 살색, 갈색, 분홍 등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부위마다 미묘하게 색이 전부 다르다. 인간의 피부색을 재현하려면 보라, 파랑, 초록, 회색 별의별 색깔들이 다 필요하다. 우리가 ‘살색’이라고 배우던 크레파스의 그 이름은 얼마나 무지한 거짓말인가. 팔레트 위의 물감이 수 없이 조합되고 섞인다. 그러다 보면 단순하게 생각되는 인간의 외피 한 뼘도 정확히 어떤 색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체에 직선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배운다. 자연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가만히 바라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안에 들판도 있고, 땅도 모래도, 산도 바다도 있음을.
이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급히 탈출하느라 그만 나는 아들의 하나뿐인 바지를 바닷가에 두고 와버렸다.
옷을 다시 찾으러 갈 생각을 하니 진짜 하늘이 노랬다.
제발 누가 나 대신 가져다줬음 싶었지만 누가 해줄 것인가. 나보다 더 꽉 막힌 남편? 한숨을 쉬며 나는 다시 해변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중간쯤 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아들의 파란 바지를 흔들며 뛰어오는 게 아닌가! (물론 흔들리는 것은 바지만이 아니었다)
“너 이거 두고 갔지! 내가 이거 주려고 너를 엄청 불렀는데 못 들었어? ”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나에게 바지를 건넸다. 아 이토록 멋지고 친절한 할아버지!!
나는 해변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허리를 숙이다 아차 싶어 눈은 질끈 감았다.
나는 역시 쿨해지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