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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Jan 01. 2024

태세전환의 기술

부부싸움도 효율적으로


9살 아들은 눈과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었다. 친구들이 갈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마른 옷을 입고 다시 놀이터로 복귀했다. 어제 펑펑 내린 눈이 녹아 슬러시처럼 질척이는데 노는덴 전혀 지장이 없는 모양이다. 


아이가 나간 틈을 타서 남편은 꺼질 듯 한숨을 쉬며 티비를 켠다.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방금 남편이 고백했다. 주식투자를 잘 못 해서 몇 천 만원을 잃었다고. 

대출 이자를 좀 메워보기 위해 나 몰래 투자했다고. 처음에는 많이 올라서 좋았는데, 결국 손실을 메우지 못하고 팔았단다. 



“그러니까 하지말라고 했잖아. 욕심부리지 말자고 했잖아.”

나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뒤늦게 해 본다.

시선을 떨어뜨린 남편의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어보인다. 말도 못하고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했나보다.




이로써 새 차를 사고 싶었던 소망은 물건너갔다. 

13년이 넘은, 시부모님이 주신 늙은 경차를 올해야 말로 고이 보내주고 싶었는데, 실패다. 차에 대한 관심도 욕심도 없어서 그동안은 감사히 잘 타고 다녔다. 근데 아이가 크니 캠핑도 다니고 싶고 교외로 맘껏 드라이브도 하고 싶다. 나는 운전하는 시간을 참 좋아하는데, 웽웽 수상한 소리가 나는 우리 차 안에선 내내 불안하다. 시속 백 킬로미터만 되도 아주 차가 부서질 것 같다. 장을 봐도 짐 넣을 공간이 부족해 아이 옆에 박스를 우겨 넣는 일도 그만하고 싶다. 몇 년 전 부터는 에어컨도 나왔다 안나왔다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제대로 못듣는다. 왜인지 볼륨을 최대로 높여도 소리가 작다. 차가 늙어서인지 차 안의 소음이 커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라면 차 색깔로 절대 고르지 않았을 핑크색. 코랄핑크라고도 하고 인디핑크라고도 하는 채도가 낮은 저 핑크색. 귀엽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다. 그냥 지저분한 핑크다. 나름 미술전공에 디자인 따지는 내가 두 눈 질끈 감고 10년을 버텼다. 이제 못참겠다!


 

작년부터 슬슬 남편에게 차를 사자 했다. 다른 집은 남편쪽에서 몇 번을 바꿨을텐데 우리집 남자는 그런 욕심이 제로다. 뭐든지 닳고 닳을 때까지, 멀쩡한대 왜? 하며 아껴쓰는 사람이다. 참 훌륭한 습관이다. 그러나 나도 이제 45세. 친구들이 타는 외제차는 아니어도 최소한  귀욤귀욤 핑키카는 어울리지 않는 때도 됐다. 남편도 내 불평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봄에는 사자, 여름에는 사자 했다. 그러다 어느덧 12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심 내년 봄에는 바꿀 수 있으려니 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날.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남편 하는 말이 차 살 돈을 주식으로 잃었단다. 집값이 두 배로 오르면 팔고 그 때 사잔다.



돈이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그동안 맘고생 했겠다, 잊자하고 속 넓은 체 했다.

그런데 집 값이 올라야, 그것도 더블로 올라야 산다니 무슨 로또 당첨 약속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 그만 화를 내고 말았다. 갑자기 사탕뺏긴 애처럼 실망하고 화를 냈다.



그렇대도 남편은 빚을 더 내가며 차를 사는 건 절대 반대다. 이미 아파트 대출 이자만도 무리란다. 나도 안다. 맞는 말씀이다. 더 화를 내 봤자 기분만 상하고 해결되는 건 없더라. 몇 년 전 우리집 경제 관리를 남편에게 넘긴 후로 나는 이런 일에 발언권이 팍 줄었다. 그러나 주식으로 돈을 날리든 벌든 나와 상의도 하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그는 그대로 철딱서니 없어 뵈는 아내가 원망스러운지 입이 나와서 티비를 노려보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 날, 유종의 미는 커녕 애 앞에서 표정관리도 안되게 생겼다.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 신이 나서 현관문을 여는 소리. 아들이 컴백했다. 


구겨진 얼굴을 억지로 펴보려는데 쉽지 않다. 입꼬리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아무 일도 없는 척 억지로 어서와, 얼른 씻고 밥먹자. 하는데 목이 꽉 잠겨서 소리가 잘 안나온다. 어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울고 싶다. 가끔은 내 성질대로 막 쏟아내고 싶지만 꾹 참는다. 아이 앞에서 그랬다가 후회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한바탕 세수를 하고 나오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나를 껴안는다. 미안하다고. 


치.. 나도 미안해. 그동안 몸이 부서져라 애쓰는 남편을 보면서도 고단한 마음까지 살피지는 못했다. 내가 조금 더 능력있는 아내였으면 좋을텐데. 남편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삶에 지쳐 서로를 힘들게하는 스스로가 아프다. 우리는 아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급히 화해했다. 



엄마 아빠가 되면서 우리는 부부싸움도 속전속결로 하게 됐다. 예전같으면 하루 이틀 삐져있을 일도 웬만하면 2배속으로 삐지고 마무리한다. 자존심 때문에 화난 상태로 버티는게 이만저만 큰 소모가 아니라는 걸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니 감사의 순간을 찾아본다. 힘든 마음 달래는 덴 받은 선물 세어보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 급히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나란히 둘러앉았다. 우리 표정은 복잡한데 아들은 그저 촛불 켜는 게 즐겁다. 올해는 내 건강 문제도 터지고, 재정적 고비도 많아서 특히 힘겨웠다. 그래도 겨우 징검다리 하나를 딛고 사방을 둘러보면 다음 딛을 데가 보였다. 언제나 살 길이 열려 있긴 했다. 더 나빠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든 사람은 실패의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많은 실패는 그만큼 많은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근육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근력이 생기고 봉우리를 맺는 고통이 있어야 꽃이 핀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힘들다는 것은 어딘가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초등 3학년이 되는 아들은 올 한해가 가는 것이 아쉽지 않다. 함박눈이 내린 것에 기뻐하면서 실컷 눈밭을 뒹굴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놀았다. 샤워를 하면서 흥흥 콧노래를 부른다. 밥을 맛있게 먹고나서 아삭아삭 사과를 즐거워하며 먹는다. 그 뿐이다. 철저히 지금에 집중하니 지난 시간을 후회할 틈도 없다. 우리는 이 작은 사람의 단순한 행복을 가능한 오래 지켜주고 싶었다. 그 마음 덕분에 철 없는 두 사람이 더디지만 조금씩 자란다.




밖을 내다보니 하루 사이 눈이 많이 녹았다. 우리의 핑키카가 흰 눈을 뒤집어쓰고 동그마니 서 있다. 미우나 고우나 한동안은 또 추억을 함께 쌓게 됐다. 기왕 그렇게 된 거 태세전환도 빨라야 덜 피곤하다. 10년이 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핑크색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숱한 실패와 성장을 함께해온 가족이니까. 



오늘은 새 마음으로 세차를 해야겠다. 그리고 2배속으로 사과한다. 

생긴거 가지고 그러면 안되는데 흘겨봐서 미안해. 

올 한해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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