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느린 나

by vonbrillo

내게 봄은 늘 제때 오지 않는 계절이었다. 대학 입학, 회사 입사, 과장 승진조차 남들보다 늦었다. 축하와 환호 그런 비슷한 것들이 가라앉은 무대, 남은 관중이 없을 때서야 난 인생의 각 스테이지에 올랐다. 이런 삶의 궤적을 변명 삼아 고백하자면, 나는 속도 감각이 둔하다. 무엇이든 한 박자 느리니까. 그러니 사랑도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참여한 어느 모임에서 ‘봄이면 떠오르는 기억’에 대해 답하지 못했는데, 이야기가 지나가고서야 그날이 떠올랐다. 2011년 봄 어느 날.


주황색 조명이 가득한 카페, 우리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목재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투욱- 나는 준비한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풀어보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은 결판을 내볼 작정이었다. 그녀는 종이 포장지 귀퉁이를 찢어 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귀여운 캐릭터 휴대폰고리 두 개. 함께 봤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휴대폰 고리를 나눠 걸며 연인이 되었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 타이밍에 멋지게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과도한 긴장감이 기관지를 꾹 눌러버려서 입술을 뻐끔뻐금 벌리고 모아봐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충, 붕어였다.


...


“그러니까 만나자는 거잖아?” 꽤나 답답했는지 기다리다 못한 그녀가 결론을 내어주었고. 나는 "그래"라는 한마디도 못하고, 미어캣 마냥 고개만 수직으로 끄덕였다. “뭐야 말로 안 하고, 그럼 이거 폰에 채워줘”라며 그녀는 휴대폰과 휴대폰 고리를 내게 건넸다. 멋진 고백을 못한 걸 만회할 기회. 최대한 늠름하게 채워주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는 휴대폰 대신 내 두 손이 오만상 진동했다. 긴장이 풀리고 이상한 고백을 성공한 기쁨으로 손이 너무 떨려서 도무지 고리가 휴대폰 모서리 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그녀를 집 앞에 바래다주고 현관문 앞에서 90도 칼각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때의 나는 그게 꽤나 남자답고 섹시한 표현이라 믿었다. 물론 훗날 그녀는 나의 한참이나 늦어버린 고백과 사귀기로 한 날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짜증을 냈다.


그 후로도 나는 지고지순하게도 답답한 타입이었고 적잖은 상처를 줬다. 너무 늦다는 말을 수십 번 들으며 함께한 지 두 해가 되어갈 때 큰 다툼이 있었다. 어떻게든 풀어보려 했으나 닿지 않는 기분이었고, 며칠 뒤 이별통보를 받았다. 찾아가고 잡아봐도 소용없었다. 수많은 통화 후 그 아이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너무 늦었다고. 친구들도 안 믿어주지만, 당시 나는 김밥 속 햄과 단무지 맛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각조차 상실한 시간을 보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나서야 원망이 먼저 가라앉고 후회만 남았다. 그리고 후회가 더 이상 불편한 존재가 아닐 때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때 그 봄만은 나에게 너무 이르게 찾아왔던 거라고. 너무 이른 봄과 너무 느린 내가 만났던 시간대를, 나는 그렇게 지나온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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