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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nnievo Jan 23. 2024

[우리 복희 씨] 할머니의 일기장

1992년_ 왜 나를 혼자 두고 가셨어요

주변 인물 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요?


 
 
입사 면접을 볼 때의 일이었다.
나는 존경하는 인물로 '코코 샤넬'을 준비했었는데, 하필이면 주변 인물로 한정된 바람에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샤넬은 주변 인물도 아닐뿐더러, 국적도 다르고, 심지어는 동시대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


 




저는 저희 할머니를 가장 존경합니다.


 






생각보다 입이 먼저 나간다는 말을 실감한 적이 있는가. 나는 저 순간 그 말을 경험하였다. 며칠을 연습했던 자기소개보다도 유창하게 말이 나갔다. 단 하나의 질문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나는 더듬지도 않고 마치 준비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였던 모양이다.
 
 





 
 
 
우리 할머니는 고학력자다.
지금의 부산대학교는 여전히 좋은 학교이지만, 동년배들 중에서 한글조차 떼지 못한 이들이 천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때 그 시절의 부산대학교는 지금과는 다른 위상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여도 흠이 되지 못했을 전쟁통에서 1940년대생의 우리 복희 씨는 철저하게 엘리트였다.
그러나 내가 단순히 할머니를 고학력자라서 존경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우리 할머니의 꾸준함을 존경한다. 매일 아침 영어 공부로 하루를 시작하는 80대 노인은 아마 우리 할머니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 중 엑셀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도 우리 할머니다. 그럼에도 배움에 대한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는지, 할머니는 꾸준히 무언가를 배운다. 하모니카도, 한국무용도 모자라서 최근에는 AI 인공지능에 대해 배워왔다며 눈을 빛냈다. 종종 '젊은애가 왜 이런 것도 모르니'라고 물을 때마다 똑똑한 할머니를 둔 것이 괴롭기도 하지만, 할머니가 똑똑하다는 사실은 누가 뭐래도 장점일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우리 할머니를 가장 닮은 손녀딸인데, 종종 상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그 사실을 실감할 때가 있다. 특히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크게 놀란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간호학과에 원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학력에 대해 일절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니 나의 전공을 정할 때에는 오롯이 나의 선택만이 존재하였을 터였다. 하필이면 나의 결정이 그때의 할머니를 닮아버린 탓에, 할머니는 그제야 매듭짓지 못했던 본인의 대학생활을 못내 아쉬워했다. 파란색 치마, 하이얀 앞치마, 그리고 네모난 모자를 쓴 젊은 날의 할머니는 살아있는 간호학개론과 같았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몰라도 대관식은 아는 옛사람에게, '실습을 갔더니 청소만 주구장창 시켜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자퇴 사유는 아마 과장이 아닐 것이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실습생들은 종종 잡일이나 하는 병풍만큼의 취급을 받곤 하니 말이다. (그러나 졸업장을 받지 못한 할머니의 슬픈 사연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간호에 걸맞은 사람은 절대 아니니.)
 
두 번째는 할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였다. 할머니가 똑똑한 사람인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문장력에 감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듬으며 쓴 글이 아니었음에도 술술 읽힌다는 점이 그러했다. 아마 나의 글솜씨는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글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비관'이다. 기쁠 땐 현생을 살기 바쁘다가, 우울해지고 나서야 글을 찾기 시작하니 글이 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 역시 할머니로부터 왔다. 할머니도 우울할 때마다 일기장을 폈다고 했다. 어찌 몇 십 년의 고통이 고작 몇 권에 담기겠냐만은, 적어도 몇 권의 고통만은 여지껏 고스라히 간직되어 온 셈이다.
 
할머니의 1번 일기장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992년의 것이었다. 사실 저것이 정확한 년도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를 기억하는 단 두 명의 인물도 썩 할아버지에 대해 긴 말을 늘어놓는 이들이 아니기에 나는 할아버지에 의한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아득히 먼 어느 날, 젊은 과부는 너무 일찍 제 곁을 떠나버린 남편을 보고파하였다. 일기장에는 온통 왜 나를 두고 혼자 가버렸냐는 원망의 말, 의료사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분노의 말, 남은 두 아들과 함께 삶을 꾸려가야 하는 막막함의 말이 가득했다. 눈물로 울퉁불퉁해진 책의 단면을 보니 단박에 그리움이 그려졌다. 할머니가 묘사하는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날것의 애환에서는 사랑이 느껴졌다.
 
일기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또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을 담는다고 했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 복희 씨에게는 해당하는 말이었던지, 할머니는 간만에 펼쳐본 일기장을 엮어 책으로 내고 싶다 하였다.

지금의 내 아픔들도 먼 훗날엔 뽐내고픈 걸작이 되려나.









할머니한테서 받은 영어 카톡. 문법이나 표현이 어색하련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께 답장하기 위해 파파고를 켜는 것은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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