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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nnievo Jan 19. 2024

어느 날 내 발목은 아작이 났다.

요양병원 간호사로 살기#1

입사와 동시에 다쳐버린 신입은 고장 난 발목을 잘도 끌며 이곳저곳을 빨빨거렸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붕대를 칭칭 감았음에도 무심결에 간간히 통증이 삐져나왔으나, 복층의 병동을 수없이 오르내렸고 이유 없이 눈치를 보며 시키지도 않은 잡다한 일처리를 하려 쉴 틈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일까, 내 발목은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종종 나를 덮치는 울적함은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환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기력의 원인이 부동인 줄을 알면서도 나는 움직일 수 없다. 이젠 조금만 움직여도 시큰해져 오는 발목이 나를 옭아맨다.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에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집에서 혼자 운동을 하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발목으로는.
그와 맞바꾼 나의 일은 그만큼의 가치가 없는 듯하다. 억울하다. 이 일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 덕에 삶이 재미가 없다. 무료한 일상이 뭐 그리 소중하다고 나는 그리도 열심히 회복을 헌납했던 걸까.
 

병원은 정말 이상한 공간이다. 아프다는 핑계 하나면 나에게 상처가 된 모든 말들이 다 나의 몫이 되어버린다. 모든 화풀이를 토해낸 이들은 비로소 편안해지겠지만, 내 속에 켜켜이 쌓인 울화는 환기가 되지 못한 채 매캐해져 간다.
좋은 말은 빠르게 기화되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어쩜 나쁜 말은 이리도 비수가 되어 꽂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나를 매섭게 노려보던 이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사유는 하난데 비난은 서너 개다. 하루가 죄스러움으로 점철되어 오늘도 나는 고개를 실컷 숙이고 돌아왔다.
 

출근 전의 나는 꽤나 수다쟁이지만, 출근 후의 나는 벙어리나 다름없다. 공통의 관심사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이들과의 대화가 괴로워서 나는 아예 입을 다어버린다.
무례한 품평도 괴롭다. 내 연애사업에 대한 첨언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돈으로 이루어진 세상 논리로 인해 내 소중한 감정들이 모두 짓밟히고 만다. 어른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단순한 사랑은 정말 무용한 것일까.
 
 

더러운 할아버지들의 희롱이 익숙해질 때쯤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이 일터는 나에게 온갖 더러움을 선사하지만, 나에게 그 어떤 방패도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을 닦아달라며 쉴 틈 없이 바지를 내리는, 신성한 의료행위로 본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인간들 따위는 아무런 제재 없이 더러운 욕정을 표출해도, 어쩔 수 없다. 병원 내 최약체인 나는 일말의 불쾌함도 드러내지 못한다. 모두가 이런 비극에 익숙해져 있으니 아무도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단, 나만 빼고.
나를 손녀 같다 여기며 예뻐하는 많은 이들에겐 죄송스러운 생각이지만, 나는 이곳이 하루빨리 망하기를 기원한다. 낡고 모자란 이 병원을 닮아가는지 나도 점점 병들어가는 기분이다. 소모품으로 허비되기엔 내 젊음이 너무 가치롭기에 더 이상 한 순간도 이곳에 몸 담그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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