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Apr 22. 2024

바다에선 휘파람을 불면 안 된대요

세이렌(Sairen) 이야기 - 말라카해협

2017.JAN.25th. DEPARTURE TO CHITTAGONG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방글라데시로


그렇게 첫 항해가 끝나고 말레이시아 앞의 말라카해협으로 나왔고, 포클레인을 내려준 배는 텅 비어 가벼워져 물에 높이 떴다.(흘수라고 하는데, 배가 물에 잠긴 깊이를 뜻한다) 그 탓에 배는 평소보다 더 출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말라카 해협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영해였다가 유조선 등 선박의 잦은 통항로로 사용되며 국제해협으로 지위가 바뀌었다.


말라카해협은 극동-유럽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항로라 선박 통항량이 아주 아주 많다, 퇴근길 2호선 지하철 처럼


각자의 선박들이 밤을 보낸 말라카해협을 통과할 때쯤 초보선원으로써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그날, 갑판 위에서 수평선 경치를 보며 휘파람을 흥얼거리다가 위쪽 브리지데크에서 기관장이 호통치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배에서 휘파람을 부나! 누구야!?

영문도 모르고 일단 휘파람을 멈추고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기관장은 한 껏 우월해지고 격앙된 톤으로, 진한 부산 사투리로 몇 마디 더 보태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배에서는 식사시간에 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저녁식사 시간에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기관장이 간부 식탁에 앉아 오늘 휘파람을 부는 나를 혼낸 이야기를 주제 삼아 실컷 떠들고 있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나 들어봤더니, 배 위에선 휘파람을 불면 귀신이 나타나고 바람이 거세진다고. 바다 위에선 해선 안 되는 행동이라고 하더라. 그땐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미신이기도 하고 우리 배는 거대한 일본산 주 엔진을 탑재했고, 하루에 수톤에 달하는 기름을 먹는 현대식 선박이었으니까.


MID-WATCH (00시부터 04시까지 이어지는 당직시간에 2등 기관사의 책임 시간)


2등 기관사와 부원 선원, 그리고 실습선원인 나로 구성된 이 조합에서 충돌 등의 사고가 빈번한 말라카해협을 지나 긴장이 좀 풀렸을 때 공해상의 어디쯤에선가 여느 때처럼 야식타임이 시작됐다.

사관님은 저녁식사 시간 때 주제가 생각이 났는지 스타벅스 로고를 아느냐고 물어봤다. 엥 스타벅스?


"스타벅스 대표 로고의 그 여자 알지? 그게 세이렌이라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인데, 배를 타고 지나가는 선원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러 유혹하는 것이 취미였대. 그 선율에 바다에 스스로 뛰어드는 선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더라고~ 스타벅스도 사람들을 유혹하는 커피를 만들자 해서 로고를 그렇게 정했대. 아무튼 뭐 미신이지만 바다에선 뭐든 조심하려는 게 아닐까?"


그렇구나, 그래서 뱃사람들은 종교가 있어도 바다에서만큼은 이곳의 전설과 미신을 그렇게 따르는구나.

밤바다를 배가 가르고 가는 장면을 오직 달빛만 비치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 또 거기에 간지러운 휘파람소리의 음역대가 귀에 들린다면 바다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세이렌 자매 그림과 현재 스타벅스에 로고, 원래 두 개로 갈라진 인어다리가 다 있었으나 선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일부만 노출된 지금의 로고가 되었다고 한다.


바다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전설과 미신을 믿는 뱃사람들이 금세 이해가 갔던 건, 바다의 신비로움과 변화무쌍함에 항상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선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망망대해 바다에 나와서 고국으로 살아 돌아가고 싶어서 그럴듯하다 싶으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종교와 미신이라도 다 믿어왔을 것이기 때문에. 바다 위에서 까딱 잘못하면 컴컴한 바다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종교보다도 바닷가에서 지켜야 할 미신들과 불문율들이 하느님보다 중요했을 테니까.  


이왕 적은 김에 배 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미신들을 정리해 봤다.

-거북이를 만나면 갑판에서 귀중한 술을 대접하고 돌려보내야 한다. 사고가 난다면 바다거북이가 등에 태워 가까운 육지까지 태워다 줄 거다.

-바다제비가 나타나면 태풍이 온다는 징조다. 죽은 선원들이 바다제비가 되어 신호를 주러 온 것이다.

-외국인 선원들은 죽었다, 끝났다는 표현을 다이라는 단어 대신 '산타마리아'라고 표현했다.

산타마리아호가 침몰한 여객선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 사용한 선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뭐가 됐던 애도의 표현이다. 콜럼버스도 결국 아메리카를 인도로 착각하고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으니 그 배는 목적 없이 죽은 배나 마찬가지다.


말라카해협을 지나며 혼나고 또 들었던 미신 이야기들이 그 이후로 나에게 있어서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으면서까지 여기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는 곳이고, 절대 방심하면 안 되는 곳. 그리고 또 무서워해야 하는 곳. 예를 들면 술에 취해 갑판을 거닐면 안 되고 비 오는 날 항해할 땐 웬만해선 밖에 나가지 않으며 방에 비치된 구명조끼와 슈트는 꼭 손 닿는 곳에 잘 둬야 하는 그런 습관들을 지키는 것 말이다. 난 7년 전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바다는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두 번째 출항은 말라카해협의 미신이야기들을 되짚으며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다. 부두 앞으로 오밀조밀한 빈민촌들과 우리를 상대로 무엇이 팔려고 눈에 불을 킨 잡상인들로 북적북적한 인구 9백만의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 치타공 항구에.


아무튼 그때 억울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했어서 죄송했습니다. 기관장님-




매거진의 이전글 첫 출항, 말레이시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