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eelTheWorld

아이러니에 끌리는 이유

0. 아이러니의 미학

by 박성열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아이러니'라는 말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쓰이지만, 어떤 의미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정의를 들여다보자. 아이러니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아이러니]

1.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실제와 반대되는 뜻을 하는 것. 못난 사람을 보고 '잘 났어.'라고 하는 것 따위이다.
2.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3.역설(逆說)에 상응하여 전하려는 생각의 반대되는 말을 써서 효과를 보는 수사법.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명쾌하게 정리되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감이 있다. 정확히 아이러니는 어떤 것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유래와 함께 구체적인 용례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아이러니(Irony)는 '모른척하다, 속이다' 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εἰρωνεία (eirōneía/에이로네이아)에서 유래했다. 에이로네이아는 본인의 생각을 감춘 채 반대로 말하는 εἴρων (eirōn/에이론)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파생되어 다양한 희랍 희곡에 등장하였고, 널리 퍼져 오늘날 아이러니라는 표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말의 층위와 상황의 층위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수사법의 일종으로, 말의 표면 상 의미와 맥락 상 의미가 반대되어 표현이 극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적 아이러니는 원래 의도한 것과 반대되는 결과가 주어졌을 때,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발견되는 정서적 강렬함을 뜻한다. 극 중에서 관객은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극적 아이러니라고 일컫기도 한다.


아이러니가 매력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엉터리라는 점에 있다. 여기 예시를 하나 살펴보자.


handmaiden.jpg

© 2025 Filmmaker's Research Lab, LLC - All rights reserved.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김민희)가 숙희(김태리)에게 건네는 이 말은 영화의 핵심 정서를 응축한 대사다. (개봉한 지 9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보지 않으신 관객을 위해 스포일러는 피하겠다.) 맥락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표현에서도 아이러니를 찾을 수 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니, 이것이 정녕 무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원자'와 '망치다'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논리 상 엉터리지만, 왜인지 이 말은 매혹적으로 들린다. 인생을 망치러 온 이를 어떻게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 내막이 궁금해진다. 묘하게 끌린다.


자, 이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자. 하면 안 될 줄 알면서도 즐거운 것, 길티 플레저를 저지른 경험이 있는가? 길티 플레저는 이성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큰 쾌락을 안겨주기에 참기 힘들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와 맞닿아있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엉터리지만, 묘하게 끌리는 마음 때문에 계속 하게 되면서 죄책감이 쾌감으로 전복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의 고약한 습관 하나를 고백한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일 때 효용을 얻는 사람인 나는, 약속 시간이 임박할 때면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빠른 도보로, 정말 촉박할 땐 달린다. 3-4분 기다려서 버스를 타면 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지만, 기다리는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싫어서 힘듦을 고사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것이 땀도 나고 숨도 가쁘고 늦을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는 할 만큼 했어, 같은 걸까. 편안한 마음을 얻기 위해 불확실성에 몸을 던지는 아이러니.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정도(正道)를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를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할지언정 어떠한 행동이나 감정을 선택하는 찰나의 순간에는 합리화를 통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정도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친 것이 알고보니 더 큰 재앙을 불러왔을 때, 반대로 그것이 재앙을 불러올 것임을 짐작하고도 그 길을 걸어갈 때 아이러니를 목격한다.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현실을 만나 뒤틀리면서 생성되는 정서적 강렬함, 그것이 내가 정의하는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현실을 만나 뒤틀리며 생성되는 정서적 강렬함


내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가 나를 무너뜨리는 불편한 진실이 될 때, 밀려드는 허망함과 실망감. 이보다 잔인한 것이 있을까. 왜 인간은 늘 한 발 늦는가. 왜 진실은 거짓 옆에서 힘을 발휘하는가. 젊음은 젊은이에게 낭비라는 말, 부모님이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왜 젊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걸까. 현실은 늘 예상과 빗나가기에 녹록치 않다. 당장의 당위에 맞게 움직이지만 그것이 계획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이러니한 삶을 산다. 아이러니를 극복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 때문에 아이러니의 잔인함을 마주한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매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질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매체다. 영화 덕분에 우리는 대략 2시간을 투자해서 혹자의 일생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 인간을 읽어볼 작정이다. 근데 이제 아이러니를 곁들여서. 아이러니라는 렌즈로 영화를 읽으며 복잡한 인간을 해체해보자. 인간은 왜 늘 한 발 늦는가? 왜 깨달음은 항상 고통 후에 찾아오는가? 인간은 왜 이렇게 선하다가도 악하며, 찌질하면서도 위대한가? 첫 번째 이야기는 오대수로부터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 1. 복수의 아이러니 - <올드보이> :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