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이d Feb 08. 2022

긴 꿈 속에서 결단을 배우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3-그린 나이트(데이빗 로워리 감독,2021)


죽음의 한 잔 앞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하네

영웅 서사는 상승의 이야기일까, 하강의 이야기일까? 내가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영웅들의 일대기를 지금 앉은 자리에서 일별해보면 그건 대개 하강의 이야기다. 그럴수밖에 없다, 결국엔.


 그건 죽음 때문이다. 유한한 삶에 주어진 영원한 과제인 그것. 아무리 잘난 영웅이라고 해도 그를 일컬어 인간적인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웅들은 모두 최대한으로 값을 치더라도 신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러한 태생적 조건은 죽음의 두터운 벽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웅이지만 나와 동떨어진 존재의 이야기가 아닌 게 된다. 결국은 그들도 죽는다. 사실은 동일하고 단지 신화별로 죽음의 시기와 세부적인 상황만이 다르다. 밀고 들어오는 노도와 푸른 서슬로 내리치는 벼락은 삶의 정상과 죽음의 골짜기를 가리지 않는다. 극적인 과업 수행만큼 극적인 죽음을 통한 마무리는 결국은 영웅들도 하강의 시점으로 점점 밀려가고 있음을 쓸쓸히 확증해 나가는 것 같다. 삶의 불빛이 소멸하는 깊은 밑바닥에서 영웅들과 장삼이사들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운명의 공동체. 그렇다면, 삶의 마지막 쓴 잔을 들고 서로 마주한 채 동시에 마시기 위해 우리는 영웅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에 입맛을 다시고 두 귀와 가슴을 갖다대는 걸까? 결국은 삶의 마지막 실을 끊는 자리에 증인이 되기 위해? 빛과 어둠, 혼돈과 질서,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 그 모든 극단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뭇 인간 공동체를 연결하는 끈은 숙고와 깨달음, 배움과 그 배움을 전통으로 삼아 대를 거쳐 흘려보내는 가르침의 가닥으로 엮여 있다.


때 아니게, 의도치 않게 나의 과업에 마주하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카멜롯 성을 중심으로 한 아서왕 신화 속 가웨인과 녹색 기사 이야기에 기초한 작품이다.  아서왕 휘하 기사들의 이야기는 서양 중세의 정신을 안에서부터 지탱하는 대표적 신화이다. 그 신화는 남성들의 신화이다. 크리스마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서구 사회의 정신적 분기점을 이루는 그 첫날을 배경으로 한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서양 정신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거나 그와 대결하며 발전해온 역사다. 가웨인에겐 아버지가 없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저녁 만찬에 가야 하건만 어머니는 '이번엔 내키지 않는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한다. 어머니는 수상한 눈빛으로 말한다. "다녀와서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오늘따라 어머니가 이상하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삼촌이자 왕인 아서는 가웨인을 옆자리로 부른다. 그리고 "오늘은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이라고 말한다. 청년 가웨인은 멋쩍게 대답한다. "아직 기사가 아닌 저는 들려줄 이야기가 없습니다". 말년의 회한에 젖은 삼촌은 그의 그런 태도에 "남자가 자신감을 가져야지!"따위의 말로 무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는 숙모인 왕비 기네비어가) 앞선 자들의 삶에 지나치게 경도돼지 말고 어디서나 '너를 알아볼 수 있게 살아 앞으로 꼭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며 위로한다. 왕은 이제 경륜이 출중한 원탁의 기사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연설을 하는데 겨울철의 냉기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 속에서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왕의 일장연설이 끝나고 일이 벌어진다. 육중한 굉음과 함께 성문이 열리고 그쪽으로 나타나는 말 탄 거한. 한 손엔 나뭇가지를, 다른 손엔 도끼를 든 그는 나무껍질같은 피부로 둘러싸인 녹색의 기사이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하나의 게임을 제안한다. '오늘 나와 겨루어 내 목을 베는 자는 이 도끼를 갖게 될 것이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그는 나의 녹색 교회로 찾아와 내게 한대로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이오". 무훈담의 깃발 아래 찬란히 빛나던 선배 기사들의 위용은 어디 갔단 말인가? 아니, 그들은 노회하여 이 내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 몸을 사리는 것이다. '아직 기사가 아닌(not yet)' 가웨인만이 객기를 부릴 수 있다. 트릭스터의 발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섣부르게 일을 저지르며 큰 변화의 초입에 들어서게 만드는 문제적 동기부여자 트릭스터. 그는 덜덜 떨면서 그 앞으로 내민 녹색 기사의 목을 단번에 자른다. '이건 게임일뿐이야'라고 거듭 타이르며 지금껏 누린 안전함을 잃지 않으려고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하든 가웨인이 칼을 내리친 순간 그는 자기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징의 별자리를 통해 이해하는 우리 내면의 신화적 지혜

 유럽 세계 안을 횡단하는 하나의 굵직한 신화는 기사 이야기의 꼴을 갖춘다. 용감한 기사는 말을 타고 야생의 지대를 돌아다니며 악한 자들을 처단하고 모욕당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칼과 웅변으로 용맹함을 증명하고, 한 여인만을 향한 순결한 애정을 지키며 고결함을 인정받는다. 그렇게 한 기사가 방방곡곡 이름을 알리며 전설로 남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성장의 본이 된다. 중세적 세계 안에서 몇몇 대표적 개인 중 남성이 마땅히 성취해야 한다고 정립된 하나의 원형이 있다면 그것은 기사일 것이다. 왕은 성취했지만 정체되어 있는 반면 기사들은 계속 움직인다. 사회적 약자들이 단지 버티거나 탄원할 때 그들은 직접 칼을 들고 앞에 나선다. 내면에 있어서는 그리움에 불타는 심장으로 신과 여신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늘 닦는다. 아마 기사의 모범은 다른 무엇으로 은유한다면 '칼을 든 수도사'일 것이다.


 이것이 신화적 세계가 쌓고 보존한 기사의 이미지라면, 역사적 관점에서 기사는 기사도라는 단단한 갑옷 안에 숨어 자신들의 입으로 밝히는 것과는 반대되는 행태를 반복하는 폭력적 지배 계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이 존재하는 것인데, 영화사를 채우는 많은 기사 이야기들도 이 두 해석 중 하나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신화적 해석'이라는 것은 역사적 관점이 비판하는 그 시대에 대한 낭만화와는 다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신화적 전형과도 결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


 신화적 해석은 상징의 드라마로써 그것을 바라본다. 모든 것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휩쓸려 자기 생각의 감옥에 갇히는 것은 라캉 식으로 말해 '정신병'이지만 상징 그 자체는 인간사와 함께하며 실재 이면의 실재로 우리를 안내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은 현재에도 유효하며, 그것이 결국 우리를 어디로 이끌던 상징적 관점-나는 그것을 곧 신화적 해석의 주춧돌이라고 보는데-은 내면에 구심점이 된다. 돌과 관련된 상징화의 두 가지 예가 있다. 봉준호의 <기생충> 속 그 수석. 민혁이 가져온 수석을 바라보며 기우가 하는 말, "이거 상징적이다. 그렇죠, 아버지?". 기우는 영화의 종막까지 그 '상징적'인 돌과 함께한다. 또 하나는 신약 성서 속 예수의 이야기. 그를 책잡으려는 자들에 맞서 신의 축복은 특정한 혈통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 그는 땅바닥의 돌을 가리키며 "신께서는 이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라고 한다. 그 이전에 그를 걸고 넘어지려는 사탄의 제안도 있다. "네가 정말 신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봐라". 상징화는 그렇게, 일상 속의 작은 것에도 집단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신화는 바로 그런 상징화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상징의 현기증에 빠지지 않을 정도에서 우리가 올려다보고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상징의 별자리가 신화의 구성력을 이루는 뼈대이다.  


 로워리의 <그린 나이트>는 따지자면, 신화적 이야기로써의 원전을 충실히 따른다. 익히 알려진 옛 이야기와 동일하게 가웨인은 녹색 기사의 목을 자른다. 잘린 목을 들고 멀쩡히 일어난 기사는 1년 뒤에 가웨인이 자신이 있는 녹색 교회로 와야하고 그때는 자신이 가웨인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확약하며(확약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웨인이 칼을 내리치는 순간 그는 그 계약 관계 안에 귀속됐기 때문이다) 떠난다. 그때부터 1년. 왕이 부른다.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가웨인은 반문한다. “그건 그냥 게임 아니었나요?”. 1년 전 그날에 삼촌도 분명히 말하기를 “이건 그냥 게임이다”라고 했건만. 하지만 여기에 말의 속임수가 있었다. 한갓 유희라 할지라도 거기에 목숨줄이 달릴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게임에도 극단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도박이라고 부른다. 도박에서 가장 큰 판돈은 자신의 목숨이다. 가웨인도 게임이라는 말값을 가볍게 치며 이것을 어느 한 날의 꿈처럼 취급하려 했지만 말하지 않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녹색 교회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방의 기사가 들어왔던 문이 다시 열리고, 그곳을 통해 젊은 기사 가웨인이 과업을 완수하러 떠난다. 그 여정에서 경험하는 모험담이 이제 그를 규정짓는 이야기로 남게 될까?

여정을 떠나는 가웨인의 시선
Green Chapel에 도착하다

문명의 성문을 지나 자연의 법칙에 노출되다

 영화 속 가웨인은 원작과 달리 이제 막 기사에 들어선, 그것도 미루고 미루다 반 강제로 그렇게 된 젊은이다. 그보다 어릴 것도 같지만 최대한 높게 잡아 20살 정도일 것이다. 술집 작부가 아직 기사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아직이요’(not yet)라고 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평생 말하고 싶은 그 한마디. 낫 옛! 심리적 아이의 드라마가 여기 있다. 섣부르게 달려드는 것도 아이의 성격이지만 미루는 것 역시 아이의 모습이다. 가웨인은 정확히 자신을 (심리적) 아이에 위치시킨다. 기사가 되는 것은 미루지만, 게임이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한번 내지른다. (이에 대해 개념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분석심리학의 영원한 소년puer aeternus에서 찾을 수 있다. 힐만에 따르면 “그는 청소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임시적인 삶을” 산다) 그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지만, 가웨인은 소극적인 아이의 게으름에 그 성격이 좀더 가깝다면 이와 반대로 즉흥적이고 막무가내로 치달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젊은 기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건 성배 신화의 원전이 되는 <그라알 이야기>(크레티앵 드 트루아) 속 이름 없는 주인공이다(후에 나타나기로 그의 이름은 파르치팔이다). 두 기사는 젊음의 두 극단에 각각 치우쳐 있지만 모두 젊은 시절의 그러함에 기초하고 있고, 판이한 성격의 두 기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 직면의 드라마로 조금씩 빠져들어간다.


 녹색 기사는 말하길 ‘1년후엔 내가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곧 자연의 원칙이다. 융은 무의식을 일컬어 ‘마음의 오지’라고 했다. 내면에도 자연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충동, 본능, 야성의 에너지가 내면의 생태계를 만든다.  바깥의 자연과 똑같이 내면의 자연 역시 녹색 기사의 확언을 핵심 원칙으로 주장한다. 너무 깊어 어둡고, 그 속을 파악하기 힘든 내면에서 어느 순간, 내가 가한 행위를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때부터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사자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그렇게 식은땀과 함께 오기 마련이다. 왕은 이것이 단지 게임일 뿐임을 명심하라고 했고, 가웨인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지만 놀이 안의 상징성이 자신을 어디까지 밀고 갈지 알수 없는 상태에선 그 말조차 모호하고 헷갈린다. 확언하는 말이나 목을 밸 때의 성취감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반면 그의 오금은 계속 저려오며 현재에 깃든 부정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주장한다. 몸만이 정직하다.


나만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순수한 힘의 논리는 사실, 일방적인 지배와 승패의 결정으로 일단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일하고 확고한 이 작은 몸뚱아리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자연의 상징이 제시하는 게임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양면성이 본성이라면 하나의 측면은 다른 측면에 문을 열어두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영주의 성에서 영주의 부인은 “왜 녹색인가요?”라고 묻는다. 미지의 기사는 왜 생명의 색인 녹색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지만 녹색이 생명만을 지칭하진 않는다. 녹색은 부패와 독의 색이기도 하니까. 상징이란 그렇다. 하나의 상징 이미지는 상반된 의미들을 포함하며 의미와 의미 사이를 자유롭게 변신해서 차용한다. 내적으로 복잡하게 꼬여있고 뱀처럼 움직이는 장기로 이루어지는 신체 구조를 가진 이미지, 그것이 상징이다. 하지만, 교육과 훈육으로 만들어진 문명화된 개인적 자아는 자연이 싸지르는 변화와 파괴, 회복의 풍요 속에서 갈피를 잡기 어렵다. 가웨인은 중세라는 표면적 시간에 머물고 있지만 그 특징에서 보면 물질 문명의 풍요 속에서 비대해진 자아상으로 자기 성찰의 코어 근육을 잃어버린 현대인에 가깝다. 우리는 가웨인이라는 가면을 통해 상징의 숲(보들레르)으로 들어간다.


 시간에는 양적인 시간과 질적인 시간이 있다. 양적인 시간은 흔히 물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지고 수치화할 수 있는 시간인 반면 질적 시간은 내적인 것이다. 이것은 경험에 따라 느끼는 시간 감각이 다르다는 상대적인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꼭 살아내야만 하는 시간이다. 대표적으로 사춘기라 그렇다. 나는 얼마전 한 권의 그림책을 읽고 ‘사춘기의 탄생’이라는 시를 썼다. 그 책을 읽으면서 드러난 대상화된 과거의 나, 사춘기를 충분히 통과하지 못한 나에게 보내는 가상의 전언이었다. 숨막히도록 뜨겁고 아름다우며 고통스러운 시간의 터널 속에서 잠든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선명한 언어가 떠올라 그것을 시로 옮겨보았던 것이다. 사춘기를 잃어버린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가웨인이 홀로 참여한 그런 게임을 하지 못한 셈이다. 게임이란 뭔가? 모든 것이 모방이고 축소이며 유희이지만 마음은 상징의 게임판 위에서 배운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유혹과 위협의 게임이 최종 보스에 이르렀을 때 가웨인은 자신의 왜소함을 직시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녹색 기사는 도끼를 내려놓고 젊은 기사와 눈을 마주하며 인자하게 웃는다. 그 얼굴을 보는데, 내 가슴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가웨인은 선대왕의 정복의 신화를 넘어서 겸허와 배움의 신화를 새로 써 나가려 하고 있다. 이번 일은 그가 인생에 최초로 겪는 위기였으며 사실 이것은 그가 성인이자 기사로 입문하는 의례였던 것이다. 잃어버린 의례의 전통이 어떤 핏줄과 심장으로 뛰고 있는지를 로워리 감독은 영문학사에 고전으로 취급받는 신화를 박물관 안에서 보는 방식이 아닌, 지금 여기의 드라마로 완성해냈다.


비정형의 바다 위로

너의 작은 날개가 날고

그만한 너의 바퀴가 구를 수 있게 해

아프지만 부러지지 않아

위험하지만 죽지 않아

거칠고 잔인해도 네가 뱉어질 일은

없어.

Green Knight 앞에서 그의 깨어남을 기다리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억울하게 죽은 여인의 백골을 건져내다

강도를 당했다. 그들이 도끼와 말을 가져갔다. 방패는 부러뜨리고 칼은 남겨두었다. 손발이 묶인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찰나지만 내 죽음을 보았다. 성 밖은 세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지체없이 알려준 셈이다. 여행을 시작한 지 반나절만에 거지꼴이 되어버린 나는 호숫가 작은 집에 들어가 빈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던 차에 한 여성이 나를 깨운다. 그곳은 그녀(자신을 위니프레드라고 소개했다)의 집이었고, 내가 누운 곳이 그녀의 침대였다. 나는 미안하다고 하며 일어났는데,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그녀는 나를 재차 다그치더니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목이 잘려 이 옆 연못에 버려졌으니 되찾아달라고 한다. 나는 어둡고 축축한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해골을 하나 건져올린다. 나는 누군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호숫가의 집으로 돌아간다. 해골을 침대 위에 놓여주고 해가 뜰 때가 되니 잃었던 도끼가 침실 기둥맡에 세워져 있다.


 여행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것이 끝난 것 같다는 생각에 사실 움직일 힘도 없다. 그렇지만 생존을 향한 본능적 움직임은 나의 나약함을 이긴다. 숨을 헐떡이며 또 누가 뒤에서 칼을 들고 쫓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무겁게 따라붙지만 두 다리를 멈추어선 안된다. 어쩌면 죽으러 가는 여행이지만, 정말 끝이 날 때까지는 살아서 나아가야 한다. 용기 내어 먹은 마음이 금방 무너지는 이 장면속의 상황은 내 삶을 돌아볼 때 자주 느끼는 감정 하나를 불러 세운다. 불안. 내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면서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불안. 이 세상의 잔혹함 앞에 나는 무르고 서투르다. 각자도생이라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버려진 삶으로 내모는 그 비정한 원칙이 가끔은 자연의 법칙인건지, 인간 사회의 민낯인건지 헷갈린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지만, 나는 달린다. 여기서 빛은 생존의 의지다. "세상의 실상 따위야 어떻든 가만히 있어선 안돼".  


 이게 정말 내 꿈이라면, 이 장면은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의 핵심을 한 그릇 분량으로 정말 잘 담아낸 것이다. 무의식이 그렇다고들 한다. 내 상황, 내가 놓치고 있지만 꼭 알아야 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내는 통일된 시선으로 무의식은 자기 목소리를 낸다고 한다.  

 

 나를 깨우는 그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이것을 정말 꿈처럼 다루는 것이라면 꿈 작업의 전제를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 그 전제는 거기 등장하는 모든 요소(인물, 장소, 날씨, 사물, 감정 등)는 나라는 것이다. 거기서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이거나 다른 면을 반영하는 투사체다. 그렇다면 나를 깨우고, 자신의 한스런 사연을 하소연하는 불쌍한 흰 피부의 여인은 나의 어떤 면인 걸까? 여성이라는 이유로, 홀로 외딴 곳에 살고 있어서, 운이 나빠서 자신을 겁탈하려던 영주의 손에 목이 잘린 여인.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생존의 기억, 실패한 자기 존재 증명의 경험같은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면에서는 그녀는 내가 가한 폭력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당신이 그 영주 아닌가요? 나를 모르나요?"라고 묻는 말에 자신은 정말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내가 무심코 가한 폭력은 쉽게 잊게 된다.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죽는다. 죄의식 없이, 주체성 없이 순간의 혐오와 공격성에 빠져 폭력을 가했던 그 일의 원혼이 나를 찾아와 너도 나처럼 목이 잘려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멋대로 잠들지 마".


 어쨌든 나는 그녀의 설움과 한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 늦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물 속에 들어가 그녀의 백골을 건져냈다. 하얀 뼈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무와 묵념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과거에 용서를 구하는 것, 과거와 화해하는 것. 그것이 없이는 제대로 앞을 향해 갈 수가 없다. 과거를 반성할 수 있을 때에야 단순한 낙관에 빠지지 않고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미래를 장미빛으로만 보지 않기. 나의 환상으로 그것을 채색하며 더 무지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을 피해가기. 결과적으로 내가 강도를 당한 것은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각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고개를 돌리고 보니 잃었던 도끼가 돌아와 있다.


 이 꿈같은 장면의 처음과 끝에 날카로운 것 두 가지가 놓여 있다. 칼과 도끼. 여기에서 칼은 공격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밖으로 향한 무기. 반대로 도끼는 내가 목을 내놓아야 하는 대상으로 내가 지니고 있지만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으로 내면을 향한 무기로 보인다. 그런 구도 상에서 내가 들고 가는 이 도끼는 제식(祭式)에 쓰기 위해 가져가는 성스러운 도구인 것이다. 나 자신, 가족, 조국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지만, 잃어버려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는 도끼의 존재는 외부의 적에만 날을 세울 것이 아니라 내가 무시하고 선택적으로 외면하며 구축한 '나'라는 강고한 자기 의식을 베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기꺼이 그 앞으로 목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지도.



왜 신화인가요? 글을 닫으며.

올해 들어 클럽하우스에서 신화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하루의 막바지인 밤 11시에 방을 열고 미리 정한 텍스트를 2~30분간 낭독하고 대화를 나눈다. 지금 읽는 책은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고혜경 지음, 한겨레 출판)인데 제주의 창조신 설문대할망의 행적을 다룬 단편들을 신화학과 인류학, 심리학적의 틀거리 안에서 보완하고 확충하며 그 오래된, 그것도 파편적으로만 남은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살려내려는 노력이 깃든 책이었다. 2011년을 마무리하는 영화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였고, 책이 바로 이 책이었는데 내가 잃어버린 삶의 생기를 다시-적어도 그 불씨만큼은-살려내는 데 도움을 받은 책이었다. 낭독 모임에는 나를 포함해서 3명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혼자서 묵독으로 읽으며 느끼고, 감탄했던 내용인데 함께 소리 내 읽으면 내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활개치던 가벼운 감상들을 다시 정리해서 이해 가능하게 바꿔내는 작업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음성 기반 플랫폼의 장 안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품는 질문은 '그래서 이 신화가 나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이다. 개별 내용에 따른 여러가지 말과 물음이 오가지만 그 모든 것을 체에 걸러놓고 보면 다시 묻노니, "왜 하필 신화인가요?"였다.

 

  오늘 다룬 이 영화와 그에 대한 내 글이 좀 더 자세한 대답이 됐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작은 잔의 멜로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