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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Feb 18. 2022

꿈결에 찾아든 작은 지저귐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4- 툴리(제이슨 라이트만, 2018)

(이 영화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이 글은 결말을 직접 밝히지 않는 선에서 작성했습니다)  

TV, Across my universe

텔레비전을 보면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광고를 보는 것도 좋았다. 그 안에서는 많은 가능성들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우주 먼 데서 날아온 메신저였다. 밤을 수놓는 별자리였고, 아침을 깨우는 종소리였다.


 오래된 텔레비전이 고장나고 한동안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는데, 그러다 몇 년이 지나 새 텔레비전이 왔을 때 나는 뭐가 부끄럽고 어색했는지 부모님이 리모컨 포함된 채 우리집에 찾아온 이 신제품을 이리저리 만지며 테스트하는 모습을 방 한 구석에 서서 얼굴을 숙인 채 수줍게 관찰하고 있었다. 들뜬 마음을 꾹꾹 눌러담는 어린이의 체면이었을까?  아니면 뭐가 겁나기라도 했을까? 하지만 낯을 가리던 것도 잠시, 나는 텔레비전에 빠져 살았다. 틀자마자 빠져들 수 있는 그 세상이 좋았었다. 가끔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을 때 부모님이 그걸 보며 하는 말들을 들었다. 모르는 것이 생길 때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버지가 역사나 정치를 말하고, 어머니는 드라마 속 여인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부모님이 그렇게 뭔가에 단순히 빠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반가웠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TV 속 이미지를 경유해 발견했을 우리 각자 내면의 꿈이나 비전같은 게 있었을텐데 빠르게 흘러가는 브라운관 속에서 터져나오는 이미지의 홍수에 밀려 그런 내밀한 것,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자기다움의 개인적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TV가 제공하는 것들은 너무 달콤했다.  


본능적으로 나를 반영하는 이미지를 찾다

마를로도 TV를 보며 자기만의 꿈을 꾼다. 그녀는 인어가 된다. 두 아이를 기르며 지금은 셋째 아이를 임신중인 만삭의 몸인 마를로는 꾸는 꿈은 비행이 아니라 수영이다. 그것은 그녀만의 꿈이다. 그녀의 꿈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녀와 함께 티비를 보며 앉아있는 정서적 파트너는 지금 없다. 마를로는 여성으로 자신감 넘치던 시절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상으로 인어를 본다. 또한, 아기를 배태하고 기르는 여성으로 수년째 살며 번 아웃되버린 상태에서 회복과 쉼이 가능한 근원적 장소로써 모태를 상징화하는 그 바다를 꿈꾼다. 돌아가 헤엄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 인어라는 맞춤의 상을 텔레비전에서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수영을 잘 못하지만, 아기였을 때라면 물에 들어가면 본능에 따라 헤엄치고 편안함을 느꼈을까? 아직 태아 시절에 살아오던 방식에 연결된 상태에서의 아기들은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손발을 움직이며 즐길 줄 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한 시절. 거기서 떠난 후에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간 그 시절 나의 세계는 망각의 세계이며 흔히 무의식이라 일컫는데 아마 그곳의 영역은 깊고 온화한 바다의 모습을 띄고 있을 것이다. 바다로 남은 그곳으로 돌아간다 한들 우리는 모태에 깊이 유착하던 본능에 가까운 존재가 더이상 아니기에 맨 몸으로는 그곳을 견디기 힘들것만 같다. 이 내 몸으로는 튼튼한 배가 준비되어야 하고 체온을 보존하며 발길질을 도와줄 장비가 없다면 다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만 같다. 그렇지만, 내 존재의 다른 부분들은 다른 방식으로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같은 얼굴이지만 몸의 반은 비늘과 지느러미로 되어 있어 어둡고 차가운 물 속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오래 숨 쉴 수 있는 인어같은 존재로.


 피상적인 이미지들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는 텔레비전이지만, 마를로는 거기서 자기 회복의 한 컷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인간의 마음이란 진흙 속에서야 진주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다시 나를 구성해야 하는 시간이 오다

제이슨 라이트만의 <툴리>(2018)는 육아의 고충과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여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신성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튀어나온 뱃살과 부르튼 피부, 하루도 맘편히 자지 못해 생긴 뜬눈의 시체같은 얼굴빛. 이것이 모성의 현장이다. 마를로(배우 샤를리즈 테론)는 그런 엄마 가진 고통의 현장성을 자기 주장이나 호소 대신 생활 밀착된 방식의 몸 연기로 강변한다. 어디서나 듣거나 볼 수 있는 실제 양육의 현장이다. 마를로는 현재 셋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을 하고 있지만, 독박 육아로 첫째와 둘재 아이를 뒤치다꺼리하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다.


 심인성 문제로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둘째 조나의 안정을 위해 마를로는 매일 아이의 몸을 부드러운 솔로 마사지해주는데 영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채광이 좋은 방 안에 떠다니는 하얀 먼지는 아기의 솜털같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ride into the sun’이 흐르며 엄마와 아들은 솔질로 깊이 교감하는 모습이다. 튼살 크림을 바르고,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마사지를 해주는 등 이 영화를 관통하는 첫 번째 감각은 접촉이다. 마를로는 하루 24시간 타인들과 접촉하는 삶을 산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남편은 회사에 가도 뱃속의 아기는 남아 그녀를 계속 만진다. 절대 혼자 있을 수 없는 삶의 현장 속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신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만 같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체력이 고갈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육아의 매서움이 어느덧, ‘나’로써만 살아갈 때 가끔씩이라도 찾아오는 자기 존재의 충일함을 한치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꿈꾸게 하고, 잃어버린 성적 매력을 대체하는 이미지를 선사하는 텔레비전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장면들의 전환과 화려한 색감과 조명, 판매를 촉진하는 노골적인 언어들의 파도 속에서 뚜렷하게 자신의 필요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인어의 한 컷을 얻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진통제일 뿐이다. 마를로는 지금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남편을 이해하고 아이들의 혈기를 버티며 살아온 가정 생활 속에서 그녀는 ‘Help!’라고 외치는 깊은 곳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도움과 보살핌이 그녀에겐 절실하지만 많은 육아 현장 속 부모들이 그런 것처럼, 마를로는 자기 욕구에 귀가 어두워졌다다. 아니, 안다고 해도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하는 게 맞는다. 밀어두기, 참기, 버티기. 그러다가 자기 욕구에 어두워진다. 하지만 모르는 상태로 평생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 상태로 있을 수 있지만 내 안에 들끓는 그 외침은 독자적으로 밀고 들어와 대문을 두드리고 안되면 문이라도 부숴버린다. 조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학교 측의 전학 권고를 받은 후 마를로는 홀로 남은 곳에서 육두문자와 함께 소리를 지른다. 차 안에는 셋째를 남겨두고. 우리는 그런 마를로의 분노를 차 안에 남아 아기의 시선으로 본다. 차문을 닫고 주차장에 서 소리 지르는 마를로.


 압사당할 것만 같은 이 시점은 곧 직면의 순간이다. 직면은 한편으로 곧 전환의 순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는 선택이 있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선택이.

선택인 듯, 선택이 아닌 듯 만난 그녀의 이름, 툴리

오빠의 추천으로 받은 한 장의 명함. 야간 보모. 그녀의 이름은 툴리. 한 여성으로 너무나 매력적이기에 시기심마저 불러일으킬 듯한 그녀는 밝고 당당하다. 말과 행동은 과감하지만 경청할 줄 알며 타인의 필요에 민감해서 전혀 서툴지 않다. 그것이 그녀의 직업에 대한 투철한 전문성에서 나오는건지, 자연인으로써 그녀 자신의 개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툴리는 마를로 가슴 깊은 곳의 구조 신호에 정확히 대응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기를 능숙하게 안아올리며 스스럼없이 마를로네 집 냉장고 문을 열며 허기를 채우고 이제 어서 가서 자라고 말하는 그 장면은 지금까지 혼돈의 도가니였던 마를로네 집 안의 분위기를 단번에 일신한다. 아직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마를로에게 툴리는 말한다. “저는 당신을 돌보기 위해 왔어요.” 누가 1차적 돌봄의 대상인지를 알고 있는 지혜로운 목소리다. 아기는 그 자체로 독자적이지만 그것은 존재의 차원이고 실제적으로는 부모와 가족이라는 그보다 큰 신체에 유기적으로 포함된 부분적인 존재이기도 한 것이기에 엄마가 더 깊이 배려받고,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마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주변을 정처없이 떠도는 갈증을 명확한 언어로 붙잡아주는 존재는 정말 고맙다.


 툴리가 나타나고 마를로의 삶은 변한다. 웃을 줄도 알게 되고, 건강을 위해 조깅을 시작한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는 짐덩어리같기만 했던 품안의 셋째가 예쁘다. 잠시만 떨어지면 그리워지고 보고싶단 말을 하게 된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무딘 편인 남편도 마를로가 생기를 찾게 된 것이 반갑다. 그것은 마를로가 몇시간 아무런 방해 없이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에만 가능한 변화는 아니었다. 물론, 잠은 중요하지만 여기서 강조점은 다른 데에 있다. 툴리는 마를로의 생활을 생활답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교류할 수 있는 상대였다. 적절한 반영과 리액션이 일어나면 사람은 자기 감정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툴리는 마를로의 낮은 차원의 욕구부터 높은 수준의 욕망까지 마를로를 이루는 모든 것에 호응하며 진실된 관심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툴리라는 존재의 성격이다. 그녀의 영롱한 눈빛이 발하는 미지의 매력은 그녀의 존재 성격이 터져 나와 만들어진 열매나 마찬가지다.


영롱한 종소리처럼 나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환상이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 영화의 결말에 드러날 반전을 포함한 것인데) 툴리는 환상성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는 이상적이다.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그녀는 마치 동화 속 요정 대모의 젊은 버전같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아기를 돌보는 데 서툰 점이 없다. 성적으로도 솔직하며, 파격적인 섹스 놀이를 유도하기도 한다. 마를로가 말한 것처럼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지혜롭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툴리는 신화적 여신상의 장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현대의 여신이다. 그녀는 당당히 문을 통해 들어왔지만 그녀가 끼치는 변화의 미풍은 작은 새의 모양을 하고 있어 창문 너머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서서히 불어온다. 작은 새 툴리의 날갯짓과 지저귐에 우리의 피로로 눅진한 몸은 개운해지고 진정 깊은 잠에 들게 된다. 유사 여신인 툴리의 환상성은 마를로의 텔레비전, 남편인 드류의 비디오 게임의 환상성과 맞서며 그것들을 대체하고 둘이 함께 생활의 맥락을 다시 잡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환상성이다.


 깨어남을 위한 환상이라니. 이 영화가 단지 육아의 고단함과 육아 현장에서 여성이 겪는 불합리한 처사 등에 집중하는 고발에 치중하는 대신 선택한 것은 환상성이 지닌 치유와 회복의 역할이다. 툴리는 그것의 화신이다. 이 영화에서 밤은 마를로 입장에선 불면의 밤, 고문같은 밤이지만 툴리 고유의 치유력을 만나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는 역설이다. 치유되기 위해 마를로는 그 깊은 밤에 깨어 있어야 했다. 고통의 시간이자 치유의 단서를 품고 있는 그 혼재됨의 '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소란이 잦아들고, 어둠이 깔린 시간인 밤이 오면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서 하염없이 뭔가를 길쌈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밤은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이 강제로 밀고 들어오려는 무례를 막아내기 위해 물레를 돌리고 다 뜬 작품을 풀어내는 페넬로페가 살아나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 문명의 상속자들로써 직접 손을 움직이거나 애를 쓰지 않아도 나를 즐거이 반영해주는 것 같은 총연색의 거울들 곧, TV, 휴대폰, 컴퓨터, 패드에 둘러싸인 우리에겐 머리나 가슴, 입이나 배에 머문 욕구의 정체됨을 풀어서 손과 발로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도움이 필요하다. 영화는 그 형상을 툴리라는 야간 보모로 전해준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잠시 한그루 나무가 되었다

하나의 장면을 말하기 전에 <툴리> 전체를 하나의 꿈이라고 한다면, 이 꿈에서 나는 마를로가 아닌 조나일 것이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내내 피부 질환으로 고생을 했는데, 특히 여름은 지옥이었다. 여름철의 피부병 증상으로 고생한 몇개의 기억은 정말 끔찍했다. 고통, 가려움, 외로움, (몸에 대한) 통제 불능의 무기력함이 뒤섞여서 입안에선 아주 쓴맛이 났다. 내 몸의 물집을 잡아내려고 부모님이 나를 보살필 때 'ride into the sun'같은 음악은 나오지 않았다. 고통은 고통인 것이다. 몸의 지난한 통증은 나를 완전히 분리시킨다. <툴리>의 기본 바탕은 사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자기 안팎의 통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현실에 있다. 거기에서 영화는 마를로에게 집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 조나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나는 조나다. 부모님이 어렵게 입학시킨 사립학교에 적응을 못해 결국 교장은 전학 권고를 했다.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낯선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이중의 스트레스다. 엄마는 학비는 싸지만 교육의 질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눈치다. 우여곡절끝에 공립학교로 전학 가는 첫날. 교실에 들어가기 전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작은 소음에도 가슴에 두근거리며 머리가 아파하는 탓에 나는 이번에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른다. 당황하는 엄마. 그런 우리 앞에 아저씨가 나타난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보니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엄마에게 아저씨는 미안할 일 아니라고 하며 나에게 나뭇가지 놀이를 하자고 한다. 두 팔을 들고 한 발로만 선 채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면 온몸을 흔들기 놀이. 아저씨는 다시 한번, 엄마에게 괜찮다고 "잘못하신 거 없다"고 한다. 나도 나뭇가지 놀이에 진정이 됐고 엄마도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짓는다.


 작은 소음도 나, 조나에겐 방해가 되고 어지러운 소음 그 자체다. 지나치게 발달한 청각이 문제다. 나의 예민함은 귀가 너무 발달했고, 귀로 퍼 나른 시끄러운 소리가 머리를 계속 울리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폭포가 있는 것만 같다. 그 요란함을 내가 다 받아낼 수가 없어서 나는 표출한다. 세상에서 나서는 것을 배우기 위한 중간 다리인 학교에서 부적응의 단서만이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두려움과 막막함은 아직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당장 내가 느끼는 혼란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마음에 다급하고 어쩔 수 없다. 불안한 건 엄마다. 나와 엄마는 그 감정으로 연결이 돼 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연결돼 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인데, 지금 나와 엄마의 연결에는 전환이 필요한 것 아닐까? 여기서는 엄마와 나의 관계이지만, 지금의 내가 엄마처럼 의지하며 애정을 요구하는 식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 사람과 나는 주로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예민하다는 건 내 성격이나 신체적 요인 때문일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지만 나를 다독이며 엄마를 위로한 새 학교의 관계자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의 여지를 줬다. 가지 털기 놀이는 잠시 나를 나무로 만들어 내 몸을 다르게 쓰는 법을 알려준다. 나무는 침묵하며 땅에 기초해 뿌리 내리고 생태계에 맞춰 적응하며 자란다. 가지에는 새와 다람쥐들이 깃들고, 잎은 벌레들의 식량이 되고 그 큰 그늘은 잠재적으로 쉼의 장소를 품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하늘에 가지 뻗으며 위와 아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며 건강함과 강인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학교 관계자를 따라하다보니 머릿 속의 소음은 잦아들고 숨도 편하게 쉴 수 있게 됐다. 내 예민함은 머리와 몸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몸을 제대로 쓸 줄 안다면 이런 증상이 나아지고 엄마와 연결된 불안의 연대도 해소되고 엄마와 나 사이에 새로운 관계의 끈을 엮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의 놀이는 상상에 기초하며 상상의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변신을 한다. 몸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나무가 되었다가 바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변신의 놀이들은 우선 재미도 있지만 동시에, 성격이나 관계성의 발달에도 건강한 영향을 끼치기 한 사람의 정신이 가진 꿈 꿀 수 있는 능력을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이전의 학교가 명문과 사립이라는 명패 안에 갇힌 머리로 학습하는 공동체였다면 그보다 땅에 가까운 이 공립 학교는 머리와 몸 사이 닫힌 간극을 메워 길을 내는 방법으로 몸 쓰는 것에 친연한, 나에게 적합한 학교일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 보는 아저씨가 직감과 본능에 따라 상황을 주도한 덕에 그 사실을 예감하며 한뼘 안정될 수 있었다.

 

치유의 알을 품은 내면의 둥지. 글을 닫으며.

환상에는 힘이 있다. 환상은 나 또는 제한된 소수만이 보는 특별히, 분리 또는 배제된 경험적 차원의 사건이다. ‘환상’이라는 단어의 어의가 밝혀내듯 환상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직선으로 달려가는 시선의 역참지이자 휴게지에 머무는 신경쓰이는 대상의 발견, 그것이 환상이다. 감각의 점으로 눈에서 시작한 환상은 점차 영역을 확대해가며 감각의 다발 속에서 전이되기 시작하는데, 강렬한 시각적 체험에 대한 믿음은 금방 다른 감각들마저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그곳으로 한마음으로 내달려 가게 한다. 한 사람 내부에서만 환상이 들끓으며 군림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를 불러세운 환상 그리고 메시지는 사회적인 파급력을 갖기도 한다.


 예술은 환상을 대중이 공유할 수 있도록 공인된 오래된 표현 수단이다. 예술을 향유하는 우리 안에 커다란 둥지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안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많은 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생명체들을 부화시키지만 어떤 알은 그렇게 죽어버린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변화가 없다. 어쩌면 알 모양의 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차차 잊힌 알들만이 모아두는 둥지가 있다. 그것을 일러 아래층의 둥지 또는 숨겨진 둥지라고 해보자.  


 하지만 그곳의 알들은 죽거나 썩은 것이 아니다. 시간에 시간이 더해진 끝에 찾아온 알맞은 환경 속에서 그 알들은 결국 부화한다. 그렇게 탄생한 생명체들은 나의 대지 위로 올라오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신새벽의 울음을 내뱉는다. 청신한 기운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예술이 그런 일을 한다. 예술이나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그런 일을 해내고 싶어 한다. 영화도 그 중 하나로써, 내 마음에 적절한 온기가 되어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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