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를 읽는다-『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이틀 전 일입니다. 아내와 함께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죠. 직장인들은 슬슬 퇴근을 시작할 때쯤이었고, 하늘을 보면서 이제 해가 6시가 넘어도 다 지지 않는 것에 또 절기가 변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끄기도 하고, 연신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로 도로 상황을 살피며 기어와 핸들, 페달을 익숙하게 만지며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건 당장 그때 하던 얘기는 아니고, 한 두 시간 전에 최근 읽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나온 얘기였는데 그 책이 환경책들에 대한 서평을 모은 것이었죠. 거기 보면 저자가 김종철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던 상황에 얽힌 다소 낯부끄러운 에피소드를 쓴 게 있었는데 그걸 차량 이동길에 주고받는 환담의 소재로 삼다보니 자연히 제 생각은 김종철 선생에게 모아졌던 것이죠. 개인적 면식은 전혀 없는 분이지만 그분의 강연을 몇 번 들었고, 당신이 쓴 글 몇 편에는 큰 감흥도 일었던 터라 제게는 멀리 계시나 마음에 버팀이 되던 분이었습니다.
가볍게 이런 저런 얘기 중에 잠깐 나온 서평집 이야기는 이미 끝난 지가 한참인데 무겁게 파래지는 하늘을 보며 감상적이 되어서 그랬던건지, 저는 뜬금없이 “김종철 선생님 보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도 그렇게, 더 이어지지는 않고 지나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년 전 별세를 하셨습니다.
김종철 선생님은 1991년 11월부터 격월간 <녹색평론>이란 정기 간행물의 발행인으로 남은 생을 사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을 많이 쓰시는 분은 아니시고, 처음의 업은 교수이자 비평가로 시작하셨지만 <녹색평론> 이후에는 근대화 이후의 문명사회가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그 깊숙한 데부터 생각하고 반성하며 말할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 될만한 글과 집필진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일을 하셨죠. 언제인지는 가물가물한데 그 시절 공무원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당시 출간된 <녹색평론> 한 권을 퇴근길에 가져오셔선 그게 무엇인지 설명해주셨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렸고, 이해도 안됐고 공감도 안됐죠. 그 후 몇 번은 어느 시골에 갔을 때나 헌책방 등지에서 지난 제호들이 몇 권 꽂혀 있는 것을 보며 이 책은 농사 짓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두툼하고 거칠고 따뜻한 손에 대한 기억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는 책처럼 제 뇌리에는 남아버렸습니다.
그러던 것을 나이 스물이 넘어, 이 또한 ‘왜인지’ 그 기점은 모르겠고 자연스레 제가 공감하고 열의를 갖게 되는 독서와 공부의 줄기들을 따라가다 <녹색평론>을 후원하며 정기로 그 책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책이 오면 정독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소장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네요. 그리고 2020년에 선생님의 타계 소식을 들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발간된 <녹색평론>도 그 끝을 맺으려나 싶은 슬픈 예감을 하게 되기도 했지요. 제가 예감한 것과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 <녹색평론>은 지난해 11월의 30주년 기념 제호를 끝으로 한 해 쉬어가는 중입니다. 1년 후에 다시라는 약속을 믿으며 이 2022년 중에 언젠가 저는 꽂아만 두고 있는 지난 제호들을 좀 진득하게 읽기도 하겠지요.
이런 배경 속에서 개인적으로도 참 신기했던 것이, 맨 앞에 밝힌 그 심심한 개인적 발언 이후였던 어제 우편함께 두툼한 서류봉투가 하나 꽂혀 있는 걸 들었는데 웬걸, 녹색평론사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거 뭐지? 평소 나오던 잡지보다 두꺼운데. 올해는 안나오는 거 아녔나?’ 후원회원에게 잡지 대신해서나마 보내는 단행본일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게 김종철 선생님의 책을 새로 엮은 것일줄은 몰랐지요. 쿼터칼로 서류봉투의 머리를 가르고 책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드러나는 제목은 낯익은 것이었지만 두께는 제가 알던 것의 배는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녹색평론>에 실었던 김종철 선생의 발간 서문들을 시기별로 가르고 모아둔 책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이래서 글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 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꼭 책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 저편에 있는 무언의 스승에게 받는 것같은 묵직한 위로의 한 권은 얼마나 따뜻하고 감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 속의 한 부분을 오늘 글쓰기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들으시던 한 분이 30년도 더 된 글(제가 읽은 것은 1995년 5-6월달 호에 실린 서문이었습니다)이라는 것에 놀라며 지금 들어도 전혀 낡지가 않았다며 신기해하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경제성장이나 개발이라는 명분 밑에서 숲을 파괴하고, 토착민의 삶터를 유린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갈수록 거주불능의 공간을 넓혀갈 때, 이 어리석은 일은 궁극적으로 진화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물질적 재화의 획득과 소비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숱한 다면적인 기본욕구가 있다.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고, 심미적 존재이며, 종교적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인 인간 욕구의 균형있는 충족이 실현되지 않을 때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의 개인적 특성 이전에 인간이라는 종(種)으로서의 특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제 22호 서문 <시골학교의 폐쇄가 뜻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