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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Feb 01. 2022

나를 찾아온 말들

그것이 나를 읽는다-『옆방의 부처』(김영민 지음, 글항아리)

저는 작년 한 해를 ‘내가 그림책과 시집을 발견한 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발견했다는 것은 처음 만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꾸준히 찾아읽게 되었다는 뜻으로 ‘발견’입니다. 그것을 또 다르게는 그림책과 시집이 나를 찾아온 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의 사건처럼, 하나의 분야라고 할까요 장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만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성격의 독서나 관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된다는 것은 내가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일정 정도 이상의 감동과 메시지를 준다는 것을 앎이 습관에 저며들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 지리산 근처 작은 서점에서 뮤리얼 루카이저의 <어둠의 속도>(봄날의 책)를 읽은 후로 무슨 일에선지, 저는 계속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주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고. 철저히 인간 중심의 언어로 말한거죠. 이야기 곧, 의미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방향 없는 나락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는 것을. 이야기라는 의미론적 우주가 인간의 중심을 채우는 존재의 심장임을 저는 믿고 있기 때문에 한 시인의 언어가 저의 작은 꿈과 오래된 신념을 제가 쓸법한 언어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줬을 때 당연히, 또 한 번 시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시를 읽음에 습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재능의 문제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라든가 괴테, 단테. 또는 두보나 이백같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언급되는 위대한 시인들의 영롱한 시적 능력은 재능 중의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시는 재능의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시를 쓰면 그게 시인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시 쓰기도 의지의 문제일 뿐인 것 같습니다. 쓰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된다는 류의 ‘Can do it’에도 관심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꼭 시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로 쓰고 싶고 시로 정리되어나오는 꾸준한 글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점에 집중해서 ‘사람은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시를 쓰게 되는 걸까?’라고 하면 제 질문이 좀더 정리가 되는 걸까요?


<옆방의 부처> 철학자 김영민 선생의  시집입니다. 인문학적 글쓰기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만한 선생이 산문가로써 오래 걸어온 산책 끝에   있었던 석류알같은 시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가 오래도록 말해왔던 인간론, 관계론, 공부론의 연장입니다. 그렇기에  시집을 읽는 것이 다소 막막하다면 선생의 이전의 몇몇 산문을 읽기를 권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시편 바로 뒤에는 짧은 해설같은 에세이들이 실려 있어 그것만 따로 떼어 읽어도 인상적인 독서 경험이   합니다. 그중 하나를  시와 산문을 그대로 옮겨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알아채면


네가 한 짓을 깨단하면

용하지


눈을 감아야 살 수 있는 거짓의 블랙홀

왜자한 소문에 스스로 너 자신을 낮게 묶으면

장하지


어리석음 속에서만 결백한 네 생각의 더께

네 진실을 짓밟고 참회하면

놀랍지


정오의 햇볕 같았던 네 고백조차 무지의 소도구

네가 누구인지 알아채면

무섭지


사욕과 원념으로 빛나는 에고의 진주목걸이

네가 네 앞에 서면

휑하지


— 자신마저도 알 수 없는 가설에 연극적으로 견결함으로써 겨우 열리는 세계가 정신분석이다. 시는 그런 뜻에서 정신분석적이다. 시-쓰기는 알 수 없는 자신의, 자신 속의 타자와 그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언어의 공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를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다림을 오용/남용하는 결과는 결국 산문보다 못한 시에 낙착하는 것이다. 타자와 무의식의 소식을 얻는 경험에도 요령이 있다. 기다림, 혹은 기다려야 함이라는 생각조차도 긴 연습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시인 이백은 술 한잔에 시 한 편씩 썼다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시는 ‘천천히 하는’ 것이죠.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다 천천히. 하지만 계속 해나가야 하는거죠. 말들이 물결을 이루는데 그 속이나 곁에서 흐르는 말의 물을잘 보되 한 두 가지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되고. 오랜 시간. 영화도 책도 잘 볼 수가 없던 끝에 다시 꾸준히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림책과 시라면, 여기에는 제가 의식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명백하게 숨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 단서가 이걸까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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