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이d Feb 02. 2022

잔잔히 흐르는 물길에 눈을 두고 마음으로 쓰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2- 패터슨(짐 자무쉬 감독, 2016)


멋진 첫 문장처럼 빛나는 영화 제목들

영화 제목을 기가막히게 짓는 감독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홍상수. 워낙 다작의 감독인지라 그의 모든 영화를 따라가며 보는 것은 어렵다. 그러다가 가끔, 홍상수의 세계가 한잔 술처럼 떠오를 때는 그의 영화를 본다. 그런데 그의 영화들은 보지 않아도 그 제목만과 포스터만 보고 있어도 별도로 내 마음에 그려지는 영화의 느낌이 있어서 다 본 것 같을 때가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밤의 해변에서 혼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당신 얼굴 앞에서'. 제목만으로 시가 되고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 뛰어난 제목들은 내가 어느 한적한 골목길을 돌아나갈 때쯤 오래된 담벼락이나 냄새나는 공공 화장실 소변기 앞에 적혀있는 낙서같다. 순간의 즉흥과 시정으로 막힘없이 싸지른 단숨의 짧은 글들. 그처럼 역시 제목만으로 멋지지만 짐 자무쉬의 영화 제목들은 끈적하고 무드가 있으며 낭만주의의 냄새가 난다. 재즈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냅킨에 끄적이다 나왔을 것 같은 제목들. 그렇게 많은건 아니지만 '천국보다 낯선',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 살아남는다'같은 제목이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미지의 역할. 영화는 이미지의 언어다. 홍상수의 경우에 말했듯이, 제목과 함께 그것이 담긴 포스터가 있다.


 가령 '패터슨'은 어떤가? 오늘 이야기할 영화이기도 한데, 주인공의 이름이자 그가 사는 도시의 이름인 패터슨을 영화의 제목으로 썼다. 이것은 흔한 경우다. 주인공의 이름, 도시의 이름. 이름만으로 지어진 작품의 입구는 쉬운 작명이고 군더더기 없이 우리가 그 작품에서 누구를 잘 봐야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 쉽게 이름 정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정직하게 쓴 것이다. 미국 살이를 해봤거나 미국의 지역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패터슨 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패터슨 시(市)의 지역적 분위기를 떠올렸을 것이고 이 영화의 모태가 됐던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와 그의 시 '패터슨'을 안다면 또 떠오르는 자기만의 정서적 연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나같은)에겐 제목만으로는 패터슨이라는 이름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포스터가 있다. 순수하게 눈으로만 보아야 하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제목. 두 남녀가 누운 침대 뒤로는 퍼플 컬러의 벽이 있고 그 위에는 벽지처럼 '패터슨'이라는 영문 글자가 큰 덩어리로 배열돼 있다. 잠든 연인을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펼쳐지는 수직의 이미지는 고요하다. 어떤 일이 앞으로 펼쳐질 지 알수 없지만 갈등이나 시련조차 이들의 세계에서는 잔잔함 속에 희석될 것만 같다. '패터슨'이란 영화는 그럴것만 같다는 생각을, 포스터와 제목을 같이 두고 보니 하게 된다.

단조로운 일상에도 꺼지지 않은 내 영혼의 푸른 불꽃

패터슨은 시인이다. 버스 운전사이지만 시인이며, 남편이지만 시인이고, 남성이지만 시인이다. 여기엔 더 많은 것들을 붙일 수 있다. 애견인이지만 시인, 군인 출신이지만 시인, 유사 무정부주의자이지만 시인, 산책자이지만 시인, 미국인이지만 시인, ....... 결국 그는 시인. 그렇지만 이것을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시인 패터슨의 시적 자산은 모두 그의 일상 속 정체성들에서 나온다. 그가 버스를 몰며 보고 듣는 것들, 집 안에서 아내와 소통하며 느끼는 것들 등. 일상이 그의 폐라면 시는 그에게 공기다. (영화 말미의 일본인 시인이 말하듯, 패터슨도 "시로 숨을 쉰다") 그러니 지금까지 나열하며 구조적으로 정리한 패터슨의 정체성의 망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도출한다면 이것이 된다. '그는 시인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완결한다'. 예술의 역사에서 맏이를 차지하는 이 오래된 문학의 형식을 통해 자기 시대를 사는 한 남성의 일상과 그 속에서 꽃피는 언어적 결정물들인 시 작품들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를 차지한다.


 <패터슨>은 단조로운 영화다. 내가 포스터에서 연상한 것처럼, 영화는 첨예한 갈등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렇게 갈만한 일들도 우습게 결판이 난다. 영화의 시간은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게, 나열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7일간. 패터슨의 일상. 주말을 제외한다면 주 5일간의 일상은 ‘집-직장-집-산책로-바’다. 수도사의 일과표처럼 반복에 반복이다. 어쩌면 생기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갈등 없는 세상.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 그것이 짐 자무쉬가 그리는 패터슨이라는 도시다. 가수, 시인, 권투 선수 중에 이름 꽤나 날린 사람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영광으로 남는다. 패터슨이 가는 바에는 명예의 전당이 있는데, 거기에는 패터슨 시가 낳은 스타들에 관한 기사나 사진이 걸려 있다. 바의 운영자 닥은 '이게 명예의 전당에 걸만한가?' 고민한다. 과거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같은 것.


 과거에 집중하고, 거기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며 만족할  삶은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기록이 있지만 과거의 많은 것은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보기 위해서는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는 분주한 일상이나 진취적인 업무를 하는 상황에서는 유지되기 어렵다. 자연히 일상 또한 차분해져야 한다. 내향적인 도시, 패터슨. 변칙이나 클라이막스 없는 잔잔한 물같은  안에서 패터슨은 시를 쓴다. 그리고 그가 쓰는 시들은 단조로움을 희석하는 동시에 증폭시키며 묘한 감동을 준다. 가령 영화 속의 첫날(‘빛이 있으라!’) 월요일, 직장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날도 어김없이 6 25분에 일어난 패터슨은 식탁 위에 항상 여분으로 놓여있는 파란색 상자의 성냥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에서 그날의 시상을 키워나간다. 성냥으로 일어나는 불꽃이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시의 위상을 말하는  같다. 잠시 일어났다 사그라들며 아주 작은 불이지만 모든 열정과 에너지의 시작이 되는 푸쉭, 하는 마찰음과 함께 일어나는 작은 불꽃. 시가 하는 일과 동일하다. 시는 우리에게 다시 살아날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호흡이다.  불은 푸른 불이다. 파란색 상자, 성냥개비 머리에 붙은 푸른  그리고 Blue Ohio라는 상표명. 한번도 그것으로 불을 켜지 않았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은 상상력의 세계 안에서  성냥개비는 푸른 불꽃을 피운다. 파란 불꽃은 영혼의 불꽃이다. 정신의 불꽃. 구약 성서  모세가 만난 신의 영령이 화한, 타오르지만 태워버리지 않는 불꽃도 떠오른다. 또아리치고 소용돌이처럼 불어올라가는 역동의 파란 불꽃을 상상하게 만드는 시작점으로 거기 정물화처럼 놓여있는 작은 성냥갑이 있다. 시의 영혼이다.


삶을 빛나게 하는 예술의 관능성

 쓴다는 행위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나? 아담 드라이버가 분한 패터슨은 갈색 가죽 커버에 고무밴드가 달린 시 노트를 들고 다니며 틈이 나면 시상을 키워 글로 옮긴다. 그 두툼하고 큰 손으로 볼펜을 꺼내 '딸깍' 소리를 내며 심을 돌출시켜 글을 쓴다. 자간과 행간이 좁다. 무선 노트이지만 그의 글은 수평의 선을 잘 유지한다. 시간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건 아니라서 누군가 말을 걸거나 일을 시작해야 하면 글을 쓰다 말고 노트를 접는다. 다시 고무 밴드를 당겨 가죽 표지를 고정시킨다. 이런 일련의 행위가 영화적 시간이자 일상의 시간인 큰 시간의 흐름 속에 작지만 독자적인 시간으로 영화 내에서 회오리 친다. 고백해야겠다. 이 영화 속에서 패터슨이 글을 쓰는 행위를 담아내는 모든 장면에서 황홀함을 느꼈노라고. 내 안에 존재하는 글쓰기의 페티시즘을 발견하게 만든 장면들이 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고. 글 쓰는 행위를 만들어내는 그 모든 구성품들은 마치 독자적인 음색을 가지고 하나가 돼 실내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일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생기 없어 보이는 나의 일상에도 에로스적 환희가 불끈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글쓰기의 페티시즘이 영화 속 패터슨의 글쓰는 행위를 통해 증명되고 있었다.


 아하!(영화를 본다면 이 감탄사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 맞다. 영화가 됐든 시가 됐든, 우리가 예술을 하는 것은 이 세계를 잘 사랑하기(eros)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물질적 세계를 단지 생존과 성장의 동력으로만 사용하고 소비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세상을 탐색하며 그 모든 감촉과 소리 등에서 뭔가를 느끼며 그 발견 앞에 놀라고 즐거워하듯이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도 그 세계의 일부인 이 물질적 세계와 애무하며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경지의 삶의 영역이 나이따위와 무관하게 항상 열려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예술적인 무엇을 하는 이유이다. 에로스적 만족이 없다면 어떻게 삶이 빛날 수 있을까? 그것이 없다면 모험가의 모험도 비즈니스일 뿐이다. 패터슨의 일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게 이어지다가 다시 시작한 월요일로 끝이 나고 지금까지 본 7일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주일들이 이어질 것을 확신하지만 그것을 보며 극장을 나서는 누구도 그 일상이 권태롭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패터슨은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시로 호흡할 것이기에 그만의 시선으로 삶의 잔잔한 흐름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의 멜로디에 경탄할 것이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갈기갈기 찢어진 나의 비밀노트를 만지작거리다.

 너무 아픈 장면이다. 꿈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 꿈을 기억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탄성이 나온다. ‘아, 이런!’ 내 존재의 정수같은 글들이 담긴 소중한 노트가 키우던 개의 분탕질에 산산조각이 났다. 한치의 자비도 없이 손톱만한 크기로 다 갈기갈기 조각나 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그게 내 노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건 수북한 종이 조각 사이에서 혼자 색을 내는 노트 커버의 파편들 때문이다. 이놈의 개xx가. 욕이 안나올 수가 있나? 그래,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살다보면. 이미 벌어진 일을 인정하지 않을수야 없지만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은 잔인하다. 내가 쌓아올린 최우선의 가치를 두었던 것이 무위가 되버리면 그것이야말로 개인에겐 최악의 재난이니까. 아무리 쉽게 쓰여진 시(윤동주)라고 해도 모두 소중한 기록이고 작품들이기에 나의 과거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만 같다. 한번도 나를 시인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시인이었다. 출판을 한다거나 등단의 과정을 거친 적도 없지만 내가 시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노트 안의 작품들인데 작품들을 다 잃었으니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닌걸까?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의 맨 위에 존재하는 자기 실현의 욕구가 갑자기 댕강! 잘려나가버린 것 같은 허탈함. 융 역시 그의 자서전 첫머리에 썼지. ‘나의 삶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전기’라고. 아내가 1년 전부터 나의 작품들을 복사해두라고 했지만 나는 내키지 않았었다. 이것들을 남기고 보존하는 것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건 아니야. 나는 작품을 쓰는 행위로 만족해.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뤄왔던건데, 오늘 이 일은 나를 뒤흔든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공모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나, 패터슨과 개, 마빈의 공모. 어쩌면, 공명일 수도 있다. 아내는 내 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랬고, 만약을 위해 복사본을 만들어두라고 했지만 나는 내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길 바란 건 아니지만, '이번 주말중에는 꼭 복사할게'라고 한 아내와의 약속을 어길수밖에 없는 상황적 구실을 바라긴 했던 거다. 늘 나를 보면 심술을 부리던 마빈이지만 내가 절박하게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인지 내가 노트를 쇼파 위에 두고 집을 비운 사이 그 난장판으로 나도 모르던 내 소원을 대신 이뤄준 것이다.


 신화적 상징에서 개는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산 자들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지키는 존재로 표현되곤 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데 한몫을 하기도 하고 충실한 동료가 되어 먼 길을 함께 가주기도 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라는 것은 잊혀진 세계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라는 뜻인데 이는 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라고도 한다. 꿈 작업을 할 때는 대체로 동물들은 무의식에서 보낸 사절이라던가 무의식에 있는 본능에 충실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존재라고도 본다. 그래서 꿈에 등장하는 동물이 있으면 특정한 꿈 속 인물 다음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특징을 살펴보라고 한다.


 마빈은 잉글리쉬 블독이다. 근육질의 다부진 몸이 일품이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을것 같은 집요함이 이 아이게도 보인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마빈도 내 안의 한 부분이고 마빈이 곧 나일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 쓰는 페르소나 이면의 다른 면을 마빈으로 투영한 것이겠지. 시큰둥하지만 할 때는 확실하게 끝장을 보는 그런 성격. 그렇게 본다면 마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뜨뜨미지근하게 미루지 말고 확실하게 결판을 봐! 복사하려면 한다. 안하면 안한다. 네가 로라를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어떨땐 확실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해야지. 은근슬쩍 남에게 떠넘기지 말고 당신 인생에 중요한 선택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해." 지금 나에게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인간의 언어보다 머뭇거림이나 애매함은 1도 없이 표현하는 동물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가 없어도 괜찮아, 나의 평범한 일주일. 글을 닫으며

이 영화를 보기 일주일 전에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을 봤다. 전 지구적 위기를 은유하고 그 안에서 복작대며 이미 너무나 강하게 길들여져버린 미디어 문화 논리에 따라 길을 잃고 헤매며 위험을 자초하는 인간 군상을 풍자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 식사 장면일텐데, 거기에서 민디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었어". 그리고 그게 아름다웠던 것은 그것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기 직전 보내는 최후의 식사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상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는 역설같지만 <돈 룩 업>의 세계에선 그 말이 성립이 된다. 정말 마지막인데 일상이어서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돈 룩 업>은 여타 재난 영화와 달리 그것을 혜성으로 돌려서 상정했다뿐이지 기후 위기로 표현되는 현실적인 위기(의 가능성)를 정확히 가리키며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영화 속 최후의 만찬이 한낱 악몽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울림이 컸다. 나와 우리 인류가 직면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아담 맥케이의 지적으로 얻은 '지금, 여기에서'라는 자리매김에서 <패터슨>을 보니 짐 자무쉬가 말하는 삶의 정수는 평범함에 있다는 메시지가 더없이 선명하게 들린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찾아온 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