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의 봄을 알리는 5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겨울처럼 장대비가 몇 주째 내리고 흐린 하늘이 이어졌다.
스컹크 캐비지가 피어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제습기와 전기히터를 풀가동 하며 우울한 이곳 날씨를 견뎌냈다.
겨우 비가 그친 어느 날, 시애틀에 가서 백내장 수술을 하고 온 L 할아버지를 만났다.
L은 올해 78세의 백인 할아버지다.
이 섬은 의료시설이 열악해, 병원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대부분 비행기를 타고 근처 대도시로 간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갈 만한 카페인 Pilot House.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쩜 이렇게 카페가 없을까?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집 밖을 조금만 나가도 카페가 즐비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파일러 하우스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라테를 마실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L 할아버지의 새로운 세상
L 할아버지는 안경도 쓰지 않고 나왔다.
백내장 수술 후 처음으로 모든 색깔이 환하고 또렷하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백내장 수술이 비교적 흔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양쪽 눈을 수술하는데 총 6000불이 들었다고 하니 한화로 계산하면 약 840만 원이다.
나보고 그 돈을 내고 수술하겠냐고 물어보길래 마음속으로 '전 그냥 한국 갈래요.'라고 대답했지만
겉으로는 그냥 웃었다.
이 섬에서는 병원 진료나 중요한 일을 위해 대도시에 나가는 김에 가족도 함께 만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L은 부인과 함께 딸과 둘째 아들을 만나 유언집행자를 딸로 정했다고 했다.
아들은 너무 감정적이어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유언장을 이 섬에 있는 정부 사무실에 가서 공증을 받았다고 한다.
유언장...
나의 부모님 나이와 비슷하기에 분명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번에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마음이 좀 힘드셨던 걸까? 어쨌든 유언장과 유언집행자에 관해 궁금한 마음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유언장과 무유언 상속, 미국과 한국의 차이
미국에서는 유언장 없이 사망하는 경우, 그 사람의 재산과 절차는 각 주(state)의 상속법(intestate succession law)에 따라 재산이 분배된다. 이를 "무유언 상속(intestacy)"이라고 하며 법원(Probate Court)이 상속 절차를 진행한다. 이때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재산이 분배되거나 가족 간 갈등이 생길 수 있어 L은 그런 상황을 아주 싫어한다고 말했다.
알래스카 주에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 항목을 포함해 유언장(Last Will and Testament)을 작성한다.
유언자 정보: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배우자 및 자녀 명시
재산 분배 방식: 예) 전 재산을 배우자에게, 혹은 자녀에게 균등 분배
유산 집행인 지정: 유언을 실행할 신뢰할 만한 사람을 지명
증인 서명: 18세 이상, 이해관계없는 증인 2명의 서명이 필요
법적으로 공증은 필수는 아니지만, 공증을 통해 '자가증명 유언장(self-proved will)'으로 만들면 법원의 검증 절차가 간소화되어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L도 정부 사무소에 가서 공증을 받았다.
작성된 유언장은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그 위치를 알려두어야 한다.
L은 집에 불에 타지 않는 작은 금고가 있고 거기에 중요한 서류들을 보관한다. 아마도 거기에 보관하실 것 같다. 이곳은 비가 많이 오지만 의외로 집에 불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에 대비해 준비하는 철저한 성격이시다.
한국의 법정 상속 순위와 유언장
그럼 한국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실 나는 재산이 별로 없어서 유언장이 그렇게 큰 효력이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알래스카로 오기 전에 유언장을 쓰고 오긴 했다. 그런데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유언장이 없을 경우, 민법에 따라 법정 상속 순위에 따라 재산이 분배된다.
우선 상속인은 배우자와 자녀들이다. 자녀가 없으면 배우자와 부모가 상속인이 되며, 부모도 없으면 형제자매가, 이후에는 4촌 이내 방계혈족에게 상속권이 넘어가고, 아무도 없으면 그 재산은 국가로 귀속된다.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유언 방식은 ‘자필증서유언’이다. 유언자가 모든 내용을 손글씨로 작성하고, 서명과 날짜를 반드시 적어야 효력이 있다.
"내 예금은 배우자에게, 집은 딸에게, 자동차는 아들에게 상속한다.
유언 집행인은 아내로 한다"... 와 같이 간결하고 명확하게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견뎌낸 후였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음'이라는 현실을 차분히 마주하고, 미리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또 용기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L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내게 그런 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의 삶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단지 재산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남은 이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삶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담는 일인 것 같다.
언젠가 맞이할 그날을 위해, 잠시 멈춰서 '나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를...
삶이 끝나도 사랑과 기억은 계속되기에...
-흐린 날씨 속에서도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거나, 책임이거나, 또는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