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것들 | 단어 에세이
나의 존재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삶은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가치'의 사전적 의미>
1.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2.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가치'에 대해 그런 고민해 본 적이 있다.
혹자는 누구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했지만, 가치가 있는 한가운데에도 보이지 않는 급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줄곧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에는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어딜 가나 그것에 값이 매겨지거나 순위가 매겨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합격과 불합격으로 명확히 나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쓰는 글만 봐도 그렇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고 그 글들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결국 그 글을 평가하는 누군가 존재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도 급이라는 게 바로 생기는 것이다.
하다못해 시장에 파는 야채들만 봐도 어떤 것은 급이 다르게 신선하고, 이 가격에 팔기엔 아까운 물건이 분명 존재하기도 하니까.
그럴 때면 가끔은 내가, 시장 놓인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야채 같다고 생각했다. 잘 요리하면 근사한 음식의 재료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정작 본인도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알 수가 없는, 그래서 그걸 파는 장사치도 이걸 얼마에 팔아야 적당한 값어치를 하게 될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래서 나도 모르는, 나의 가치를 열심히 알려야 한다는 그 현실이 외로웠다. 가치를 드러내야 나의 값어치도 올라간다고 믿었기에.
나는 그렇게 가치와 값어치를 종종 혼용하고 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미나 소중함은 가치가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금전적으로 손해나 이득이 있는지를 따질 때는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
나의 존재나, 글과 그림, 나의 시간 등 보이는 나의 모든 것에는 가치가 존재하고, 그 가치는 타인과 만나면 어김없이 값어치가 매겨진다.
타인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제까지 스스로 만족스럽고 제 아무리 반응 좋은 글이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돈을 들이기엔 좀 그런 것들로 치부되어 가치 있는 것들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하고 단정짓기도 했다. 가치와 값어치가 마치 동일시 된다고 여겼을지도.
이런 당연한 순리들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순리의 혜택을 받게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품 넓게 이해되기도 하겠지.
사람은 본디 태어나면서 우렁찬 울음을 보여야 인생의 첫 장을 잘 시작한 존재로 인정받는다. 자라면서도 끊임없이 내 존재를 증명해 내야 하고, 그 증명은 때론 나와 내 가족의 훈장이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이러다 죽을 때도 가치 있는 죽음인가 아닌가의 심판대에 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든다. 그건 어쩐지 좀 가혹하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의 문제라고.
그러니 그곳을 벗어나, 나를 온전히 인정해 주는 곳으로 옮기라는 그런 글을 어디선가 보았다. (정확히 원문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음)
나는 그 글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를 수박이라고 생각하고 웃는다.
어쩌면 내가 야채가게에 홀로 있는 수박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국을 끓일 때 넣을 수도 없고, 반찬을 할 수도 없는, 그러나 아주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과연 수박은 존재 가치가 없는 걸까?
과일가게로 장소만 옮겨주면 그 가치는
달라질 수도.
가치나 존재를 탓하기보다 환경의 문제로 판단하고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그 판단을 하고 결정하기까지, 기저에는 내가 나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탕되어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야채가게에서 과일가게로 옮긴 수박이 그렇게 용감하고 멋져 보일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이
생길 때마다 멋진 수박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정신승리 멘트까지 더해주면 아주 효과적이다.
'내가 여기 있을 위인이 아닌데..?'
가치를 높이는 것은 스스로를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남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