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나를 이루는 | 단어 드로잉 에세이

by 최소소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기록'의 사전적 의미>
1.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 글.
2. 경기나 물품의 판매 등에서, 성적이나 실적을 일정한 수치로 나타냄.

꾸준히 기록하는 삶을 선망하면서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느낀다. 나에게 기록은 매년 세우는 다이어트 계획이나 어학공부와 닮아있다. 언제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만, 결국 끝맺지 못하는 리스트 중 하나인 것이다. 다이어리의 첫 장을 펼치면 나를 만나볼 수 있다. 첫 페이지는 성실 그 자체이다. 반듯한 글씨체, 차분한 색감의 형광펜, 계획된 적당한 여백까지 모든 것이 예쁘고 정갈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소한 오타나 비뚤어진 글씨체 하나에 균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결국 못마땅해진 내 손은 가차 없이 종이를 죽죽 찢어낸다. 그렇게 페이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던 것처럼 사라진다.

찢김의 세월이 쌓여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만 남겼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또는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기. 이미 뒤처졌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조바심과 자책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대한 중심을 잡으며 끝까지 가기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경로를 이탈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나에겐 집으로 가는 길, 자주 가서 익숙한 길 모두 네비를 켜둔 채 운행하는 강박적인 습관이 있다. 처음엔 언제 이탈할지 모르는 변수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그게 상황에 대한 변수인지 나의 변덕에 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아는 길 외에는 점점 도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행여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다음 도전에도 비슷한 선택지를 고르곤 한다. 잘못 들어선 길을 또 한 번 반복해서 잘못 들어선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정말 고집스럽고 엉뚱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나에게 안정감을 되찾아주기도 한다. 어쩌면 나에겐 새롭고 낯선 길보다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익숙한 길이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주 보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모 연예인이 러닝코스를 완주하고 나니 강아지모양의 궤적이 완성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길을 잃고 좀 더 돌아가게 되면서 원래보다 귀가 긴 강아지가 완성이 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귀가 긴 강아지가 되어버린 궤적을 보며 오히려 잘됐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익숙한 길을 선호하면서도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모두가 같은 궤적이 아니라
더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기록에 적용해 볼 때 조금 서투르고 고친 흔적이 남더라도 꾸준히 기록을 이어가면 어디든 나만의 목표에 도달하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기록을 하고 싶을까. 기록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토록 원하는 걸까. 무엇이 내 삶에 사실로 남길 바라는 지도 알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기록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다이어리의 첫 장처럼 헤매지 않고 뚝딱 써낸 글보다 두서없이 투박하더라도 나를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을 마주하길 원하고 있다는 걸 요즘 깨닫고 있다. 어쩌면 내가 경로를 이탈하면 이탈할수록 내 삶의 기록 또한 더 특별하고 풍성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가령 꼬리가 몽실몽실한 강아지나 몸이 풍선처럼 둥근 강아지를 내 삶의 궤적으로 귀엽게 마주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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