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호]'첫(처음)'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여전히 처음인 게 있다니
정말 신난다.
언젠가 배우 이하늬 씨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 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켜보는 나조차 마음이 환해지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처음'이라 하면 그런 풋풋함과 설렘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의 처음은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처음이라는 순간에 유쾌한 감정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부딪치며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유치원 발표회 때 핸드벨 연주를 했었다. 작은 양손에 쥐어진 핸드벨을 정해진 순서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기분 좋은 진동이 느껴졌다. 아이들마다 정해진 음이 달라 그 작은 소리가 모여 하나의 곡을 만들어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신기함도 잠시 단체곡은 한 명이라도 다른 음을 내거나 박자를 놓치면 그 마디는 온전한 곡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두려웠다. 내가 박자를 놓쳐서 무대를 망칠까 봐.
핸드벨을 쥔 작은 손가락 마디마다 촘촘히 땀이 배었다. 그럴수록 나는 핸드벨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것이 미끄러져 내손을 벗어나 관객석을 향해 날아가는 아찔한 상상을 하며.
무대가 시작되고 에델바이스가 핸드벨 소리로 울려퍼졌다. 연주가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에 긴장이 풀린 나는 연주하는 나에게 심취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목을 한번 더 힘차게 움직였다. 그 부분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챙-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아주 고요했던 공연장에 내가 퍼뜨린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잡을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잡아채오고 싶을 만큼 가장 얄미운 영롱함이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내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목을 살짝 빼고 쳐다보는 시늉을 했다.
누가 그랬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쇼맨십이었다. 그건 마치 내가 그런 것이 아님을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려는 일곱 살 다운 대처였다.
그게 얼마나 허술한 대처였는지는 발표회 비디오를 다 같이 거실에서 보던 날 되어서야 깨달았다. 실수하자마자 아닌 척 행동하는 내 모습을 직관해 버린 나는 내가 우리 집 거실 바닥의 먼지보다도 더 더 작아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부터였을까. 새로운 것, 처음 하는 것들은 여전히 나를 도망가고 싶게 만든다.
살면서 처음 겪는 것들은 너무 많다. 새 학기부터 신혼여행까지 하다못해 새 옷처럼 처음 개시하는 물건들조차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소중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나는 새로운 것보다 가능한 한 익숙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부모가 되면서부턴 아이의 처음을 목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첫 등원이나 처음 떼는 발걸음처럼 아이의 모든 처음은 내게 사랑스럽고 설레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주인공인 아이도 나처럼 즐거웠을까. 내가 아이였을 그때를 돌이켜보면 설렘만큼이나 두려움도 확실히 강렬했다. 내가 아이의 처음에 기꺼이 설렐 수 있었던 건 나는 이미 그 과정을 겪어본 어른이자 결말을 알고 있는 관찰자였기 때문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깨닫고 있다.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어쩔래?
내 삶은 설레는 처음보다 주눅 드는 처음이 더 많았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가끔 마주하는 낯선 일들 앞에서도
'잘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위축감이 먼저 고개를 들기도 한다. 어른의 처음이란 이토록 고단하고 외로운 것이다. 나 홀로 다른 방향을 빼꼼히 바라보던 일곱 살 그때처럼.
어른이 되어 이 서툰 처음들을 겪어내는 지금의 나를, 지켜보는 내 부모님의 표정이 문득 궁금해진다. 내 기억에 실수를 했던 그날도, 발표회 비디오를 함께 보던 그날도 부모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아이의 서툰 발짓을 보며 그랬듯이 나의 부모님도 나의 처음들을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으로 응원하고 계실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의 모든 처음 뒤에는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누군가의 따뜻하고도 안쓰러운 시선이 늘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나의 서툰 시작들을 관조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나의 처음은 언제쯤 사랑스러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