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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사람 Sep 24. 2020

누가 꼭 부르는 것 같아서






아침에 대문 앞에 배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나보다 큰 마음들 사이에서  혼자 비좁게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마음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피자마다 온갖 벌레들에 갉아 먹히는 국화는 한 계절을 위해 쓸쓸하게 지는 꽃이다. 그래서 국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주일 전 시장통 바닥에 깔려 있던 소국들을 보기 전까지는. 세수도 채 못한 눈곱 낀 얼굴로 엄마 손에 딸려 새벽시장에 나온 아이들 같았다.  그곳에서 옹기종기 다닥다닥 꼬장꼬장 울긋불긋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올 처음 가을을 그때 만났다. 연민처럼 화분 몇 개를 들고서.





병원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셋이다.
셋 모두 우리 병실에서 만났다.
1은 우리보다 먼저 입실한 발목 수술 환자로 30대 청년.
2는 우리 병동 간호사인데 언제나 환자들에게 투덜거린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투덜거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특출 난 재주가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이젠 그 표정이 재밌다. 3은 우리가 입원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오후에 들어온 옆자리 환자.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아는 형이랑 식당에서 씨름을 하다가 어깨가 깨져서 왔단다. 그렇다. 이곳은 어딘가 깨지거나 부서졌거나 꿰매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병원 밖은 코로나로 난리도 아닌데 이곳은 평화롭다. 동물원 같다. 나는 멀리 서서 들여다보는 사람. 고장 난 남편을 감당하느라 가을을 이미 땡겨쓴 기분만 빼고.






네가 그립던 오후가 있었다.








마스크 속에 얼굴을 가리고 산 지 몇 개월.
립스틱이 필요 없는 생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
어쩌다가 입술이 노출되면 설마 설마 마음이 위태롭고
그러다가도 속 시원히 크게 웃고 싶고
빨간색이 너무 바르고 싶고
자꾸 거리로 나가고 싶고
미소는 그립기만 한데
우리는 멀리서 눈만 멀뚱멀뚱 치켜뜨고 있을까.






이불 빨래를 시작으로 집안, 마당, 창문, 베란다, 천장 먼지를 치워나가야 한다. 3일 정도 코앞으로 다가오면 장을 봐야 하고. 전전날 재료 손질과 마음 준비. 바로 전날은 글로 쓸 수 없을 만큼 동선이 복잡해서 패스. 하지만 그보다 복잡한 것은 남편의 무릎이다. 남편은 어쩌자고 무릎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함부로 자신을 방치했을까. 추석도 못 지내고. 어떻게든 병원을 잠깐 나오려고 기를 쓰는 것 같은데 글쎄. 도와줄까? 말까?






모두 끝났다.
이번 주 월요일을 끝으로 1,2차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가. 110명의 선수가  모두 발표 났다. 우리 학교에선 단 한 명의 선수가 선택되었다. 동환이가 제일 믿고 따르던 선배는 선택받지 못했다. 3학년이 빠진 후, 훈련의 강도가 세졌고 뭔지 모를 긴장감이 생긴 모양이다. 막연했던 프로 관문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탓인지 동환이도 조금 달라졌다.
엄마, 주말에 나가면 트레이닝 잡아줘.
마사지도.






그 와중에도 미야모토 테루의 장편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를 다 읽었다. 좋은 문장은 없었지만 느리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같았다. 그래도 이런 문장에는 밑줄을 그었다.

'배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각각의 꽃이 그저 피고 싶을 때  피는 자연스러운  조합이 아름답다. 정말이지 잘난 체하지 않게 심어 놓았는데, 반대로 그것이 바로 기쿠에씨의 잘난 체라고 생각하며 겐야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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