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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복 Sep 25. 2023

삶의 거친 파도를 다툼 없이 잠재우는 법

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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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갈수록 몸과 정신이 약해짐을 느낀다. 사람이 성인으로 장성해 살아가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지면 내 안의 작은 나는 이제 더 이상 늠름했던 어른이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 간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어려지고 약해진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작은 힌트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 (마 18:3)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우리 관념 속 어린아이는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반응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쉽게 웃고 쉽게 운다. 쉽게 믿고 의지한다. 또 아이들은 나중을 기대한다. 내가 커서 무엇이 될지 고대하고 그것이 오직 자기를 기쁘게만 해줄 것이라 여긴다. 우리 몸은 죽음을 향해 늙어가지만 영은 이렇게 더욱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어려져야만 천국과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편 내면의 어린아이가 되면 어른 일 때와는 다르게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쉽게 상처를 입는다. 자칫 이전과는 다른 이런 자신의 반응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하다가 부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그럴 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뭐, 이깟 일로 자꾸 신경을 써. 나답지 않게."


 나 다운 것은 무엇일까? 긴 세월 동안 사회화 된 나라는 캐릭터는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나의 영혼은 순수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내면에 존재한다. 세월에 굳어진 자아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전과는 다르게 쉽게 상처받고 신경 쓰고 있는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랜다. 이내 마음속 저 깊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감정을 감춰두기 바쁘다. 타인들은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채지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순수의 영혼에 타의로 인한 불쾌한 기억, 화, 슬픔, 상처, 증오, 후회, 연민, 괴로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불쑥 몰려온다면 그 원인이 얼마나 중요한 대의명분이었건 삶에 작은 영향도 끼치지 않도록 항상 내면을 꾸준히 관찰하고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멀리 감춰두려 한 그 감정이 삶의 표면적인 부분까지 곧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원수는 외부의 상대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아닐 때 즉 미워하거나 원한이 쌓인 상대를 지칭할 때 우리는 그를 원수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내가 원하지 않는 상태일 때와도 마찬가지이다. 화내는 내 모습, 슬픔에 빠진 내 모습, 원망과 후회에 빠진 내 모습, 철없이 감정에 갈팡질팡 흔들리는  내 모습이 일, 이년도 아닌 수십 년째 그러고 있다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의 그 원수를 내가 먼저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때가 묻은 내 모습을 내가 알고 예전보다 더 자주 닦아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내면의 진정한 영혼은 순수와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순수할수록 더 쉽게 때가 타는 법이다. 급성적이던 만성적이던 마음에 들러붙은 부정적인 감정은 가장 먼저 우리 육체에 영향을 끼치고 또 다양한 삶의 문제들로 다시 돌아온다. 상처를 잠재의식 속에 고스란히 품고 넘겨버린 지난 세월 속 묵은 감정의 기억이나 추억등도 마찬가지다. 건강하고 힘 있던 젊은 시절의 어려움과 고통은 그때 무심코 지나 칠 수 있었지만, 소화되지 않은 낡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그대로 남아 몸 안에 있다가 면역에 취약해진 자신이 되면 불쑥 신체나 환경의 문젯거리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인 우울증, 화병, 암 등이 될 수도 금전적인 어려움, 도박 중독, 이혼, 자살 등의 심각한 삶의 문제로도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강인한 엄마, 건강한 아빠였고 충실한 가정의 버팀목이자 말 잘 듣는 착한 딸, 아들로서 기둥 같은 자식이었다. 그렇게 사회적 지위도 감당하느라 바쁘게 애써왔고 충분히 대가를 치러내야 했다. 그런 모든 업적이 나름의 보호막이자 훈장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차면 그렇게 나를 싸매고 있던 사회적 옷들이 하나씩 벗겨진다. 그렇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지치고 또 연약해져 말 그대로 발가벗고 순수해져 버린 자기를 발견한다. 매번 만나는 친구 또는 자식들의 대수롭지 않은 작은 말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고 상처를 받는다. 누가 그랬다 더라는 말이 내내 오래 마음에 남아 되뇐다. 부정적인 감정이 심장으로 전해져 잠자리를 뒤척일 만큼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지경이 된다. 그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나를 괴롭히다 결국 그릇된 판단을 하거나 머리를 싸매고 병이 들어버린다. 몇 년 전 아니 엊그제만 해도 반응하지도 않을 하찮은 일에도 마음이 요동치는 유치(?)하게 변해버린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 것이다. 또 나를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 그 상황과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시도도 멈춰야 한다. 우리는 너무 빨리 서둘러 주변과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노력한다. 게다가 따라가 주지 못하는 나의 헤아림을 꾸짖기까지 한다.


"내가 왜 그런 일 하나도 이해해 주지 못하지? 나 같은 어른이 그깟 일에 상처받으면 안 되지!"

"그 사람도 생각해서 해준 말인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해."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주는 내가 속이 좁은 거야."

"아무 의도 없이 한말일 텐데 기분이 상한 건 이런 내가 너무 예민해져서야."


 이런 식의 자기를 탓하는 모든 생각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 어떤 자기 성찰도 상황을 개선해 주지 못한다. 대신에 나에게 먼저 사랑의 마음을 듬뿍 담아 상처받고 시무룩해진 나 자신을 용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털어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약해져 있는 내면의 아이를 먼저 보듬고 쉬게 해 준다.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부정의 감정을 진심으로 사랑으로 품을 때 부정의 감정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과거의 아픔이나 상처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 역시 마찬가지다. 다양한 이유로 존재하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지금 여기 현재의 시간으로 데려와 그들 하나하나 품고 위로해 준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우리 마음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평안과 치유가 일어난다.


"이런 일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나를 용서해."

"견딜 수 없이 약해진 나를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해."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아. 다른 이들은 나에게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어."

"마음이 힘들고 어렵지만 나는 회복할 수 있고, 충분히 회복한 후에 일어나면 돼. 그때까지 나를 충분히 옆에서 보살펴 줄 거야."


 이렇게 제삼자의 화법으로 충분히 자기 마음을 보살피고 난 후에 그 감정들이 어디로 가는지 잘 지켜보자. 그런 뒤 상처를 준 상대방, 지난 사건, 또는 앞으로의 걱정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도 늦지 않다. 이런 이해의 시도는 내 감정들이 충분히 괜찮아지고 여유가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들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어 정말로 평화로운 상태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괜찮아졌다면 그런 시도를 하기도 전에 모든 일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하찮은 일이 되어있을 것이다. 자기 이익만 바라는 나르시시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은 자기감정해소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해소가 모두 잘 이뤄졌다는 증거는 안심과 사랑의 감정이다. 모든 일이 나의 잘못도 그 사람의 잘못도 그때의 잘못도 아닌 자연의 섭리로 나타난 증상의 하나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거기에는 인간의 어떤 이해도 의지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면 어느새 부정의 감정은 깨끗이 녹아내려 안정과 평정심에 상태에 이른다. 그런 다음  나와 세상 모두를 애틋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감정이 가슴 깊이 솟아오르면 그들을 축복하는 상태에 이른다. 진리를 알면 내면 치유가 일어난다. 그렇게 진리가 내 안에 존재하며 그 존재를 깨닫는 순간 어떤 상황과 조건이든 그 진리를 아는 만큼 모두 헤아려진다.


 그래서 매일 끝없이 우리는 자신을 헤아리는 자기 치유의 방편을 취해야 한다. 그런 자기 관측의 양식은 각자 다르지만 자기 성찰 또는 기도나 명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나 명상, 참선 등과 같은 행위는 측정 가능한 즉각적인 결과물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 한계가 있다. 여기 그 한계를 극복할 훌륭한 대안이 있다. 눈으로 측정 가능하고 어제의 마음을 오늘 또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자체로 완전한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당신이 얼마나 치유되고 있는가, 얼마나 평온과 사랑을 느끼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즉흥적인 드로잉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즉흥드로잉을 통한 자기 진단을 실천하며 매우 효과적인 내면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매일매일의 자기 진단결과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 즉흥 드로잉은, 시선을 오롯이 내면의 자신에게 맞추고 감정의 정확한 진단과 동시에 치유를 두 눈으로 경험할 수 있게 고안된 최선의 이성적인 방식이다. 자신을 달래고 사랑해 주는 이런 처방은 지금 이 순간 현존하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지극히 느끼는 지복의 상태가 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모두 선을 향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누구보다 나 자신을 우선해 온전히 사랑해 줄 때 자기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궁극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지나온 세상의 허울들을 벗고서도 당당할 수 있는 자유를 맛보며 새롭게 태어나 날아오를 준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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