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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 Story Oct 14. 2019

네 이름이 뭐니?

처음에는 두려웠던 그 말.

살면서 내 이름을 밝혀야 하는 순간은 너무나 많다. 다른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내 이름을 소개하는 자리라면 무슨 고민이 있겠는가 그냥 말하면 되지.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이름을 말하기를 주저했고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호치민의 새벽을 가로질러 밤새 비행하던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 약 한 시간 전. 승객들이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고 승무원들도 서둘러 착륙 준비를 마쳐야 한다. 베트남 항공의 호치민-인천 노선 이코노미 클래스의 착륙 준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착륙 준비 안내 방송이 나오면 잠에서 깨어난 손님들을 위한 음료 서비스를 시작으로, 식사 메뉴, 헤드셋, 쓰레기를 수거한 뒤, 손님들이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착용하도록 안내한다. 보기에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실제로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280명의 승객이 전부 승무원의 지시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이 없을 뿐이다. 


헤드셋 수거 봉투를 쓰레기봉투와 착각하는 사람, 화장실이 급한 사람, 음료 정리를 마쳤는데 물이나 오렌지 주스 외에 다른 음료 주문하는 사람(보통 물과 오렌지 주스는 사람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여분으로 빼놓지만, 다른 음료는 카트에 넣어 잠가버린다), 소화 불량을 호소하는 사람 등 다양한 예외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착륙 한 시간 전은 설레지만 동시에 혼돈의 카오스이다.

  

어느 정도 짬이 차고 나서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 나의 발걸음은 총알처럼 빨라 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승객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제가 부르는 거 못 들으셨어요?' 나중에는 들려도 못 들은 척 지나친 적이 꽤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비행을 시작한 지 갓 한 달이 지났을 때였으니 정말 그 승객의 목소리를 못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가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냐며,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나에게 따져 물었고, 나는 죄송하다고 거듭 말씀드렸다. 그런데도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갑자기 내 이름을 물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지, 사무장이 회사에 리포트를 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머릿속에 스쳤다. 이름을 다르게 말해볼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내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이름표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시기에 회사에서 컴플레인 레터가 접수됐다고 따로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그는 컴플레인 레터를 제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사람은 승무원에게 이름을 묻는다는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그 한마디로 나를 두렵게 만들었고, 자기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사람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어쨌든  사람으로 인해 한동안 복도를 지나다닐 , 승객의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으니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라고 좋게 포장해본다. 

  

 일이 있은 후 한참이 지나 나도 어느덧 비즈니스 클래스 승무원이 되었고, 또 한 번 내 이름을 묻는 승객이 있었다. 이 날은 한국 여행사에서 빌린 다낭행 전세기라 여행을 떠나는 기쁨에 들뜬 승객들의 주문이 많은 날이었다. 한 젊은 남자 승객이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는데, 그 승객 말고도 주변에서 주문이 워낙 많아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갤리로 돌아와 밀린 음료를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내가 깜빡하고 처음 주문한 오렌지 주스가 아니라 ‘물 주문하셨죠?’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랬더니 그 손님이 자기가 주문한 건 물이 아니라 오렌지 주스였고, 나의 기다려 달라는 어조가 기분이 나쁘지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이 두려운 풋내기 승무원이 아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또박또박 이름을 알려주고 갤리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이름을 물었던 손님과 두 번째로 이름을 물었던 손님 사이의 시간차가 1년은 넘으니 그 시간의 간격만큼 나의 경험치도 달랐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베트남 승객들은 한 번도 이름을 물었던 적이 없다. 베트남 승객들은 아마 한국인 승무원보다 말이 잘 통하는 베트남 승무원을 불러 그의 이름을 물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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