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대표음식이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피쉬앤칩스나 애프터눈티 정도를 꼽을테니 말 다했다. 호주 역시 영국과 다를 바가 없다. 이번에 느낀 것은 맥시코 요리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딸도 멕시코 요리인 부리또나 타코를 좋아했다.
해변가 식당에서 먹었던 피자와 치킨은 어찌나 짠지 닭고기는 한 조각 먹고 다시는 손을 댈 수 없었다. 피자도 이만 저만 짠 것이 아니지만 요기를 해야 하니 두조각을 먹었다. 와이너리 투어할 때 가이드가 얘기한 소고기요리는 한번 먹어봐도 좋을 거 같아 주문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서 굽기에 대해 신경을 안 썼다. 구운 야채가 잔뜩 올라간 요리인데 소고기가 거의 레어상태라 고기를 좋아하는 딸도 먹기 힘들어했다.
서양은 우리와 달리 빵이 주식이다 보니 어딜 가나 기본 빵 외에도 디저트용 빵이 넘쳐났다. 하나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페스트리나 스콘, 머핀이 우리나라 크기의 세배 정도는 커보였다. 대표적인 마트인 울월스나 콜스에서도 어마어마한 섹션을 빵에 할애하고 있다. 마트 빵은 공장빵일거라 생각해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하나 사 먹어보니 맛있다. 그 후로 애용했다.
과일, 야채야 워낙 풍부하니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번에 맛을 들인 것은 블랙베리와 크랜베리다. 블랙베리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과일이라 먹어보았는데 모양도 앙증맞고 당도도 높지 않으니 편하게 아침으로 먹기 좋았다. 작은 딸기처럼 생긴 크랜베리도 생각보다 달고 맛이 좋았다. 아침은 주로 요거트와 과일로 가볍게 시작했다. 여행을 가면 한차례 정도는 조식을 신청해 먹었었다. 먹을 수 있는 양은 적은데 과하게 차려진 음식에 어느 순간부터 거부감이 일었다. 이번에는 딸과 합의해 조식을 신청하지 않았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도 퀄리티있는 요깃거리들을 많이 찾을 수 있어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가기 전부터 제일 걱정했던 것은 밥을 어떻게 먹을까였다. 50대 중반이 되면서 밥을 하루에 한끼라도 챙겨먹지 않거나 과식을 하면 어김없이 소화제를 먹어야했다. 일주일씩 고생할 때도 있다. 멜번에서 어떻게 밥을 먹어야하나? 햇반을 싸가 야하나? 작은 전기냄비를 챙겨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예전에 먹었던 일본 스시가 생각났다. 아직도 팔고 있겠지? 막연한 기대를 하며 갔다.
역시나 아주 인기 있는 음식이고 역마다 스시점이 있었다. 시내에서도 찾기 쉬워 하루에 한 끼는 스시를 먹었다. 한 번이라도 밥을 먹으니 속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 외에는 다양한 요리를 맛보았다. 딸과 함께 타코, 브리또, 피쉬앤칩스, 달걀요리, 아란치니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요리를 시도해보았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레스토랑 밖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식사를 즐기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즐거운 식사와 오가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합쳐져 ‘아! 이래서 여행을 오는구나’ 하며 행복했다. 물병 하나도 멋있어 보이고 플레이팅도 남달랐으며 요리 또한 혀를 춤추게 해주었다. 비싼 가격과 살찌는 걱정은 잠시 미루고 현재를 맘껏 즐겼다.
편안한 딸과 먼 곳까지 와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웃으니 그동안 고생한 것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교사 생활하며 힘들고 괴로웠던 모든 시간들은 오늘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 할 정도로 행복했다. 그 지난하고 버거웠던 시간들을 잘 버텨준 내가 기특했다. 음식하나 놓고 무슨 궁상이냐 하겠지만 오랜 시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똑같은 일을 수없이 해낸 후에 이뤄낸 결과라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때는 몰랐다. 내게 이리 행복한 시간이 올 줄. 내게 들어오는 수입으로 사랑하는 딸과 좋은 곳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행복. 어디서 뚝 떨어진 돈이 아니라 나의 힘으로 벌어 당당히 쓸 수 있는 내 돈이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만들었다. 딸을 낳지 않았다면 이런 시간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동행자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어디를 가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딸을 키우며 힘들었던 시간도 스쳐 지나갔다. 고생할 때는 몰랐다. 이렇게 불꽃놀이처럼 찬란하고 빛나는 시간이 내게 주어질 줄 그때는 몰랐다.
골목골목 재즈바들이 포진해있고 옅은 불빛으로 영혼을 달래주는 레스토랑들이 즐비해있는 곳, 멜번. 실망할 것들도 있지만 좋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눈만 뜨면 ‘오늘은 뭘 먹으러 갈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하는 곳이다. 방송국 건물 2층으로 올라가니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즐기는 공간이 나왔다. 샐러드와 콜드푸드를 사먹을 수 있는 곳이라 우리도 트라이해보았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먹는 간단한 식사였는데 만족도가 높았다. 거기에 오렌지케잌 한 조각과 커피를 곁들이니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분위기도 좋고 맛도 훌륭했다.
멜번은 스타벅스가 들어왔다가 망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커피 체인점을 찾기가 어렵다. 모두 자기 가게만의 커피에 자부심이 있다. 커피맛이 모두 수준급이라 실망한 기억이 없다. 디카페인라떼를 주로 먹는데 맛있었다. 카페모카도 달지 않고 좋다. 맛없는 커피는 용서가 안되는데 맛있는 커피를 내어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딸이 주도하는 여행프로그램으로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을 수 있어 무한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분위기와 여유로운 시간들, 맛있고 새로운 미식의 세계로 데려가 준 딸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호주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 중에 ‘아사이볼’이 있다. 아사이열매를 가루로 내어 스무디처럼 만들고 그래놀라와 각종 배리류의 과일을 얹어 먹는 것이다. 딸은 이 요리를 좋아한다. 찬음식이라 나는 즐기지 않는데 딸은 오리지널을 맛볼 수 있어 많이 좋아했다. 보태니컬 가든 테라스카페에서 이 요리를 팔고 있어 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것도 기억에 남지만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느냐가 여행의 성패를 좌우한다면 과장이려나? 이번 멜번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리와 음식을 맛볼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